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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면 Jun 06. 2023

03. 힘낼 수 없는 응원 '힘내'

심연: 찢어진 마음 들여다보기

 '힘내'. 우리가 가장 많이 듣고 쉽게 말하는 응원.


 내 기억 중 행복했던 '힘내'는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 전,  학교 시험 또는 자격증 시험 치기 전, 첫 베이킹 도전 또는 새 회사 첫 출근 날. 그것은 꽃과 같은 미소와 함께 주먹 쥔 손이 절로 올라가는 응원이었다.


 그러나 버림받고 학대받던 때와 의료사고를 당하였을 때와 같이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시점에서 들은 '힘내'라는 말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들렸다.


 나는 그 모든 상황에서 수도 없이 탈출을 시도했으며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날아오는 칼날들은 나를 점점 한 걸음, 한 걸음씩 물러나게 만들었고 결국 벼랑 끝으로 도달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상에 외쳤다. 너무 힘들다고 누가 날 좀 알아봐 달라고. 그러자 '힘내', '극복하자', '이겨내야지'라는 메아리가 돌아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버티고 있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힘을 내야 하는 것일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기적인데 여기서 무얼 더 해야 극복이며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늘 힘을 내어야만 하는 존재인가? 왜? 무엇을 위해서?

  물론, 당장에는 '그래. 세상이 전부 그렇게 말하니까, 다들 그러고 사는 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니까, 힘을 내고 극복하고 이겨내긴 해야겠지' 다짐해보기도 한다. 그 다짐 속에는  스스로도 힘을 내고 싶고 그래서 다시 밝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힘의 100%는 하루하루 벼랑 끝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데에 다 소진 돼버려 세상이 말하는 힘을 내려면 200%의 힘을 내야 되는 것이었다. 그 벽이 너무 높아 한순간에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마지막엔 이 '힘내'라는 단어가 의도와는 다르게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로 나뉘게 되어 힘내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했고, 이겨내지 못했으니 나는 곧 실패한 것이고 패배자라는 자기 비난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 '빨리'라는 단어가 붙으면 그 가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빨리 힘내야지라는 말이 너무 무겁고 힘에 부쳐 내 힘을 극도로 앗아가고, 빨리 극복하자라는 응원이 빠르게 주저앉게 만들며, 빨리 이겨내라는 응원이 빠르게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


 셀 수 없이 날아드는 칼날에 찔리고 베여 아픈 나를.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고생했던 나를. 너덜너덜한 몸과 마음을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현재의 나를 그대로 봐줄 순 없었을까? 조금은 그냥 기다려 줄 수 없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선 항상 달리고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나 운동장에서 어떤 아이가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큰 상처가 나서 울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아이에게 얼른 일어나서 달리라고 말할 것인가? 상처가 생겼다면 치료를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날 때부터 출발선이 달랐고 보호구 하나 없이 남들보다 더 많은 장애물을 통과해야 했던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선상에 서기 위해 사실 더 많이,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고 못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상태이다.

 

 나는 사실 너무 아프고 슬프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쉬고 싶다. 그만 힘내고 싶다. 그 마음이 벼랑 끝에서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쉬고 싶은 건지 아니면 벼랑 끝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건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마음이 다쳤으니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쉬어가는 시기가 있다고 말해주었다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너의 아픔을 치유하는데만 신경 쓰라고 그래도 늦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게 당연하며 나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면, 적어도 그 수많은 날을 더 힘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채찍질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실패와 패배감을 느끼며 나를 부정하거나 존재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다.

 '힘내'라는 글의 시작과 함께 사용했던 저 손짓 이미지가 마냥 행복한 응원으로만 느껴지는가? 가끔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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