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yss Nov 20. 2023

나와 스즈코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2021, 여름



   1년 전(이 글은 2021년에 작성된 글이므로 1년보다는 더 전일 것이다), 나는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를 리뷰한 글에서 주인공인 스즈코를 '자기 힘으로 살겠다며 도망친 겁쟁이'로 표현했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인해 범죄자가 되고, 주변의 모두가 등을 돌린 상황을 박차고 뛰어나와 어디든 발을 붙이고 살아 보려 분투하던 그때의 스즈코는 내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내겠다는 다짐으로 뾰족하게 뭉쳐 있었다. 어디에서든 무작정 일하다 백만엔이 모이면 떠나기를 반복하던 떠돌이 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방황하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그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아가는 스즈코의 사연은 감동을 주었으나 그뿐, 글을 쓰고 난 이후에는 한동안 스즈코라는 청년을 자주 떠올리진 않았었다.

  일과 사람, 삶에 치여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은 약 2주 간의 폐쇄병동 생활을 마친 직후였다. 오랜만의 바깥바람을 쐬며 거리를 걷던 나는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스즈코를 떠올려 냈고 문득 그와 내가 많이 닮아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감과 두근거림, 가벼운 불안감을 품고 산책 중이던 나에게, <백만엔걸 스즈코>의 스크린 마지막을 장식하던 스즈코의 상쾌한 표정이 겹쳐온 것이다. 상황적 유사성에서 오는 공감과 더불어 입원 기간 내내 몇 번이고 읽어내려갔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은 마치 스즈코와 내가 특별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까지도 들게 했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고 시작하는 시의 첫 소절은 꼭 하루하루를 포기하면서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으며 입원을 준비하던 나와도, 주변의 시선에 더욱 아무렇지 않은 듯 가출을 위한 짐을 챙기던 스즈코와도 닮아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나 자신을 내려놓는 듯 보여도 속으로는 끈질기게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저 걸어가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몇 달 직전의 나를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한참을 걸어도 사방이 물웅덩이여서, 계속 내리막이어서. 그런 날에는 누군가 내게  시련이란 쉬이 버틸 수 없는 세기와 속도로 온다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밤이 찾아오면 이 밤을 뿌리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내딛는 발걸음에 더욱 힘을 실었다. 입원이 다가올수록 나는 더 불안해했지만 동시에 막연한 안정의 장소인 그곳을 간절하게 원했고, 입원 과정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안도감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폭풍우와 비바람 속을 달리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고요 다음이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은 세뇌처럼 나에게 새겨져 있고, 나는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던 흰 토끼 한 마리를 이상할 정도로 간절히 찾아 헤매는 언덕처럼, 나에게 다음 기회가, 버텨낼 다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인지 불안해져서 눈앞의 토끼를 향해 무작정 달리게 된다. 어디에서든 백만엔이 모이면 떠난다는 말도 안 되는-비합리적인-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는 스즈코처럼, 아무리 사소한 나쁜 자극도 주어지지 않는 병원 안에서, 그 병실의 침대 위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로 다시 나만의 뜀박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겁에 질려 달리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실은 우리가 토끼를 쫓는 것이 아니라, 얼른 토끼라는 평안을 획득해 앞으로 더 나아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성숙해져야 한다, 라는 강박으로부터 쫓기는 중에 불과한데. 쫓는 중이 아니라 쫓기는 중이라는 결론의 증거는 더욱 명확하다. 스즈코는 집을 떠나 밖으로 뛰쳐나왔고, 나는 스스로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 폐쇄병동으로 숨어들었는데도 평안을 얻기는커녕 되려 다음 평안을 찾아서, 다른 토끼를 찾아서 달리기를 계속했으니까.

  그렇게 달려서 결국 우린 어디에 도착했을까? 목적지 없는 경주에 지쳐 주저앉아 버렸을 수도, 한 겹 더 나를 보호해 줄 곳으로 도망쳐 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름, (<백만엔걸 스즈코>의 배경은 여름이다) 스즈코와 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달려와 멈춰선 곳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스즈코도,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처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과 표정으로. 발 닿는 곳마다 웅덩이가 즐비한, 발이 푹푹 빠지는, 그러다가도 숨이 벅차오를 정도로 쨍쨍하게 해가 내리쬐는 언덕을, 그 쏟아지고 타오르는 시간들을 바보같이 뛰어다녔을 뿐인데 말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타당한 인과관계도, 연결고리도 없어 보이지만 이 여름을 겪은 나는, 이 마법같은 교훈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달리기는 충분했다고, 전혀 무용한 일이 아니었다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은 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크게 휘두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