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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11

2025.03

by Abyss




올 듯 말 듯한 봄을 눈앞에 두고

일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일정 관리에 어려움이 있는 편이므로 좀 바쁜 하루들


요새는 하루를 하루로 체감하며 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단순하게 지낸다기에는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들이 좀 많긴 하다

그래도 그때그때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한다 + 해야 하는 것과














솔직히 너무 전에 조금 알고 지내서 완전히 다 까먹은 친구로부터 불쑥 연락이 왔다

신기하다 싶다가 어쩌다 내 생각이 났냐고 물어보니 답변은......

— 영화는 계속 나오잖아


내가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 같았나?


가끔 이렇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지난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면 기분이 많이 이상하다

물론 기쁘고...... 기쁘지만

아마 이전에 나를 스쳐간 사람은 모두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일 거라 예상했지만 더는 곁에 없는 사람

그렇게 예상하지 않았지만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사람

그리고 예상한 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

또 예상치 못하게 불쑥 나에게 연락해 오는 사람 — 생각이 났다는 말은 참 강력하다


아무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만나고 있고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이 유효하다













최근 듣는 음악 - 무식 이슈로 장르명으로 대답할 수 없음

J pop, 대만 락, 영미권의 뭔가 말랑한 90년대쯤의 노래, 올드스쿨 미국 힙합


공통점? 들으면 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여름에 듣는 차오동을 좋아하지 않는 법은 몰라












The edge of the world, 1937, Michael Powell

한국어 제목은 <세상의 끝>? 왓챠피디아에서는 또 달랐고


영어자막조차도 없이 봐서 대사 이해가 굉장히 힘들었다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 악센트가 너무 심해서 가끔은 불어 같기도 했고 독어 같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이 영화를 봤다고 말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100 퍼센트 다 즐기진 못했지만

뭐라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긴장되고 슬펐다


장식을 했을 테지만 이 영화를 보면 아무 장식도 없는 것 같고

정말 순수한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순수한 풍경, 얼굴, 해상절벽, 눈물, 강아지와 고양이, 교회......


고립된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떠날 것인지 머물 것인지 갈등하는데

영화는 그 갈등을 어떻게 표현하고 연출할 의도 따위는 없어 보이고

그냥 그렇게 갈등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












사람의 삶이라는 건 정말 그가 볼 수 있는 곳까지, 손닿는 곳까지 포함되는 개념인 것 같다

거창하게 몇십 개국을 여행하는 사람이 더 궤적이 넓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생활하는 장소나 집단 듣는 소리 냄새 눈치채지 못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내가 사는 동네에 서식하는 식물들이라든가...... 그런 면에서 자기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의 식물들을 궁금해하고 하나하나 발견하기를 즐거워하는 우메는 왠지 좋은 사람일 것 같고)


그래서 미야케 쇼의 영화를 사랑한다고도 생각한다

그 인물을 둘러싼 시공간의 풍경, 주변 사람들, 고민과 웃음거리들, 들이마시고 뱉는 공기까지도 인물에게 견고하게 밀착된 느낌

그런 느낌이, 고작 어떤 인물을 2시간 지켜봤을 뿐인데도 그 사람이 정말 생활하고 살고 있구나

이 감독은 사람이 있는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요새 책도 꽤 읽었다 제일 좋았던 책은 그르니에의 <섬>이지만...... 무튼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분명히 몇 년 전에 샀는데 이제야 읽은 게 신기하다


아마 나는 그때 읽지도 않고 어떤 사람에게

나 이 책 읽으려고, 라고 말했고

그 사람이 먼저 읽고 재미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었다


재미있었어










유튜브 댓글 모으는 걸 좋아한다

글쎄 뭔가 왓챠피디아나 다른 리뷰하는 곳들보다 날것의 감상이 있어서?


폴을 사랑하는 일은 폴 앞에서 완벽한 연인인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라는 시몽

문득 전에 캡처했던 이 코멘트가 떠올랐다

저건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에 나오는 테루하시 코코미에 대한 말인데

그는 자기가 완벽한 미소녀라고 생각하고, 사실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완벽한 미소녀로 보이기 위해 전력투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완벽한 사람을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다면 완벽한 사람이 맞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정을 연기하고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하는 건 역시 사랑이 맞다

어찌저찌, 나도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해서 그렇게 보인다면, 좋은 사람이 맞다


간략하게: 그 사람의 추구미는 그 사람을 꽤 많이 설명한다











자포자기한 자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인데

여기서의 자포자기는 무력한 사람이라기보다 도를 지키기를 내버린 사람에 가까운 것 같지만

(공부를 등한시한 전공생의 의견)


뭐 누구와 말하기 위해서나 같이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앞부분만 읽어도 참 와닿는 맞는 말이고


전공 시간에 학우(라고 쓰고 한참 동생이라고 읽는다)들이

철학은 별로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고 하고 아마 교수님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세상 사는 방법을 듣고 배우는 것보다 유용한 학문은 없지 않나

라고 공부를 등한시하는 전공생이 목구멍을 무엇인가 삼키며 중얼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페드로 코스타 인터뷰


어떤 장르여도 가리지 않고 천착하고 있는 요즘의 주제:

비밀, 신비, 미지...... 이런 것들


영화가 정말 훌륭하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는 말

나도 아주 드물게 받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 그 영화에 필연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그 틈에 파고들어...... 그 영화를 내 삶의 풍경으로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저 경지를 넘어서서 이 영화가 나를 기다려 왔다는 생각까지 한 적 있음





또한 비밀이라고 할 때

그리고 또 영화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비밀을 존중하는 태도가 곧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존중이라고도 생각한다

비밀 자체를 존중하는 것도, 너에게 내가 모르는 비밀이 얼마나 있는지조차 나에게 비밀임을 인정하는 것도












힙합 곡을 듣다가

'죽은 대통령 좋아함'이라는 말이 지폐를 좋아한다, 돈을 좋아한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죽은 작가나 죽은 영화감독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생존 중인 작가는 다섯 손에 꼽는다 아마도


혹시 고고학자로서의 자질은 아닐까

내가 랩 가사를 쓴다면 이걸 뭐라고 하지 등의

헛생각을 잠시












혼자 교실에 올라가기 무섭다는

입학한 지 열흘쯤 된 초1 아이에게 돌려준 너의 대답

무서우면 용기를 내


내가 좋아하는

너의 간결한 다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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