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 와이드 셧 (Eyes Wide Shut, 1999)
그 어느 영화보다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 이 영화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재미있게 해석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의 후반부에는 빅터가 '이 모든 것이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시퀀스가 펼쳐진다. 이 시퀀스는 주인공인 빌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후 해설처럼 삽입되는 시퀀스이지만, 영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시퀀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빅터와 빌의 대화만으로 구성된 이 시퀀스는 꽤 수다스럽고 설명적이어서 관객들을 조금 질리게 만들지만, 관객들에게 보여 주는 방식과는 별개로 이 시퀀스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꼭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빅터가 말한 이 게임의 주최자, 설계자를 외부 세력이라고 가정한다면 <아이즈 와이드 셧>은 거대한 음모론 영화가 되지만, 이 게임을 자아-초자아-이드의 관계가 대립하는, 플레이어도 설계자도 모두 빌인 게임이라고 상정한다면 영화는 조금 더 다른 차원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하고자 한다.
설명을 이어나가기에 앞서,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이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순서대로 이드는 본능적인 욕망과 욕구의 저장소, 자아는 이드의 욕망과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타협하는 중재자, 초자아는 도덕적 완성과 자아 이상을 추구하도록 평가하고 비판하는 심판관을 담당한다.
그러니까 거칠게 정리하자면 <아이즈 와이드 셧>은 한 남자가 이 셋의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하룻밤 악몽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악몽의 근원지는 순결하고 정숙하다고 믿었던 아내 앨리스의 고백이다. 빅터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돌아온 앨리스는 몇 해 전 여름 휴가에서 그녀를 '힐끗 보았던' 해군에게 가졌던 욕망을 털어놓는다. 동시에 그녀는 앨리스는 그를 솔직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빌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이란, 앞서 설명한 이드-자아-초자아의 맥락, 즉 정신분석학적 맥락으로 설명하자면 무의식의 아래에 위치한 원초적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식적인 변명이 개입되지 않은 당신 날것의 속사정이 알고 싶어. 앨리스는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앨리스의 도발이 물꼬를 틀어 빌은 무언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일차원적으로 그 의심은 아내 앨리스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빌은 앨리스가 해군과 관계를 맺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망상은 점점 선정성을 더한다. 그러나 비록 빌이 해당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하더라도, 빌이 가지는 의심의 대상은 앨리스가 아니다. 빌은 앨리스가 그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적어도 앨리스가 그렇게 고백했으므로.) 그가 진정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은, '결혼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탐하지 않는다'는 초자아의 원리, 그리고 그 초자아에 의해 제어받는 자아이다. 그리하여 <아이즈 와이드 셧>은 빌이 자신의 의심을 따라가는 이 하룻밤의 여정에 관한 내용이고, 그 여정은 초자아와 이드의 아슬한 줄다리기 속에 이어진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는 빌이 욕망(이드)에 접근하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어떤 방해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드에 접근하려는 빌을 가로막고 제어하려는 초자아의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전화가 걸려오는 것, 더 정확하게는 벨소리라는 청각적 자극이다. (영화 속에서 전화는 너무 심한데? 싶을 정도로 자주 걸려온다.) 또한 때로 그 방해는 누군가의 직접적인 개입이기도 하고, 전혀 뜬금없어 보이는 사건(예를 들면 레인보우 분장실에서의 사건; 빌이 코스튬을 빌리는 일을 방해한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빌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초자아는 전이식-무의식에 걸쳐 존재하는데, 뜬금없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무의식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젯밤 꾼 꿈의 내용을 복기하면 의식 상태에서는 굉장히 뜬금없이 느껴지지만, 꿈을 꾸는 도중에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비슷한 맥락에서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빌의 방황이다. 우선 묘하게도 빌이 헤매는 길거리는 그의 상류층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길거리에서는 질 낮은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오고, 매춘부가 말을 건다. 이 이질감, 낯섦의 장소를 빌은 목적 없이 헤맨다. 길거리를 계속해서 걸어다니는 빌의 행각과 이상하리만치 척척 들어맞는 우연들이 관객들이 접하기 기이할 법한데도 전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하는 빌의 방황 장면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특성을 빌린 자연스러운 낯섦을 재현한다.
또한 빌이 어디를 가든 보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역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형상을 그리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일종의 마스코트인데, 화면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함은 빌이 이 게임을 여행 중임을 암시한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빌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을 끄고, 자고 있는 앨리스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물론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마스크가 앨리스의 곁에 놓여져 있었기에 비롯된 공포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으나, 일면 자아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아래를 들여다보려 했던 빌의 시도가 좌절되었음을 알리는 비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시각 연출적으로도 <아이즈 와이드 셧>은 매우 흥미로운데, 우선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인물의 내면, 이드에 접근하려는 주인공을 그리면서도 역설적으로는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이다.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는 인물의 클로즈업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덕분에 영화는 조금 더 고전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자칫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샷 종류의 단조로움은 여러 변주된 앵글을 통해 해결한다. 예를 들면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번갈아 바스트 샷이 사용되더라도, 감정이 고조된 한 인물은 로우 앵글로 비추는 식이다. 즉 두 인물을 각각 다른 앵글로 비추는 방식의 연출을 통해, 미묘하고 기울어진 인물이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 주면서도 보는 사람에게 시각적인 변화를 제공해 지루함을 해소하고 있다.
빌의 여정이 끝나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앨리스는 빌에게 '지금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전히 지난밤의 기이한 여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빌에게 이 대사는 중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꿈과 무의식, 욕망의 세계를 방황하는 존재들이 아닌, 눈을 형형히 뜨고 의식의 세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라고 앨리스는 조언하는 것이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크리스마스 시즌의 쇼핑센터로,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오프닝의 파티 준비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그러니까 빌은 일상의 공간에서 꿈의 공간을 경유하여, 다시 일상의 공간에 도달한 것인데, 같은 곳에서 시작해 같은 곳으로 돌아왔지만 빌은 하룻밤의 체험을 통해 일상(현실)의 세계와 꿈(욕망)의 세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달라붙어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빌에게 지난밤의 꿈이, 그리고 우리에게 <아이즈 와이드 셧>이라는 영화가 은밀히 전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욕망이 우리의 껍질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은 파고들지 말 것을 언제나 흉흉하게 경고하고 있다는 점. 이드와 초자아가 미묘한 힘겨루기를 반복하고 그 가운데 선 자아를 지키기 위해, 내가 나이기 위해, 우리가 우리이기 위해 눈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하나의 사실. 우리는 결국 욕망이라는 내피를 꼭꼭 숨기고 보호하며 살아가는, 어떤 덩어리들이라는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