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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Oct 12. 2023

피로한 희망의 끝에서 남는 예감

마른 풀에 관하여 (About Dry Grasses, 2023)


  주인공 사메트는 4 년째 튀르키예의 시골 마을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썩고' 있다. 그곳은 사메트에게는 지옥이며 똥통이다. 3시간 17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는 그곳에서 괴로워하며, 곧 전근할 기회만을 노리고 그 이후의 삶만을 상상한다. 자신이 처박혀 있는 환경을 탓하는 짜증스러운 불평불만과 하소연은 덤이다. 그런 그에게도 유일한 낙이 있다면 똘똘하고 귀여운 학생 세빔과, 사진을 찍는 취미가 그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권태롭고 불만스러운 하루가 지속되던 중, 사메트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학생 하나가 그를 성추행으로 고발한 것이다. 사건에 대한 말과 말들이 뒤섞이고, 사메트는 곧 자신을 고발한 학생이 세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 학생이 세빔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사메트가 경험한 만큼을 보여 준다. 그는 세빔이 자신을 고발하는 장면을 직접 보지도 않았고, 고발을 들은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확인한 것도 아니다. 돌고 도는 말과 추정이 더해져 세빔에 대한 사메트의 실망과 증오는 깊어진다. 고의로 교실에서 세빔을 부당하게 혼내고 학생들에게 폭언을 한 날, 그것을 신고한 사람 역시 세빔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 타이밍에 세빔이 교장실에 들어가 무언가 말하는 장면을 사메트는 확인했다.)


사메트에게 세빔은 왜 그렇게 특별한 학생인가? 사메트는 멋대로 세빔에게 초월적인 희망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편애하고, 남들의 말만 믿고 세빔을 손쉽게 증오의 대상으로 돌린다. 따라서 혹시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자기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사메트의 분노는 스스로에게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세빔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심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 교실에서 '관점'에 대해 가르치는 시퀀스는 이러한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표현한다. 


 사메트의 유일한 취미인 사진 찍기 역시 그러한데, 사진이란 영상에 비해 언제나 단편적인 정보만을 포착하는 매체이다. 또한 영상과 비슷하게 찍는 사람의 주관이 잘 반영되는 매체이기도 하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사진 장면은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하기도 하는 동시에, 사메트의 관점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인 것이다. 영화에서 관점의 중요성은 영화 속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른 풀에 관하여>는 크게 두 종류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풍경 장면, 다른 하나는 길게 이어지는 대화 시퀀스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누라이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누라이와 사메트의 대화는 그 둘이 서로 아주 다른 관점을 지녔다는 것을 단적으로 잘 드러낸다. 


 <마른 풀에 관하여>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영화의 말미에 가서야 제목의 의미를 드러낸다. 사메트는 눈이 녹은 여름의 마른 풀들을 밟으며, 한때 희망으로 여겼던 세빔도 발 아래 밟히는 마른 풀들처럼 생기 없이 바짝 마른 존재로 성장할 것이라 저주에 가까운 혼잣말을 읊는다. 사메트의 내래이션을 바탕으로, 여전히 눈을 맞고 있는 세빔의 묘한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과연 겨울과 여름뿐인 이 척박한 땅은 사메트의 시각에서는 좌절스러운 환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빔은 정말 사메트의 예언대로 자라날까? 영화는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세빔의 눈빛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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