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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Nov 20. 2023

이런 사랑 이야기

사랑에관한짧은필름(A Short Film About Love, 1988)

 


  사랑은 다른 그 무엇과도 다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통해 떠올리는 것들은 사람마다 너무 다르고, 하물며 한 사람이 '사랑'에 갖는 개념마저도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이러한 특별한 속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필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제목은 그 제목만으로 겸손하기에 진정성 있는 무언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토메크이다. 그리고 토메크가 사랑하는 한 여성, 마그다이다. 토메크는 건물 맞은편에 사는 마그다를 매일 밤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그 행위는 분명 비윤리적이지만, 토메크가 마그다를 지켜보는 순간 흐르는 애상적인 음악은 이 영화가 윤리 건너편에 있는, 어떤 감성에 대해 고찰할 것이라 예언하는 듯하다. 





  토메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그의 사랑의 행위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토메크가 마그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망원경으로, 어떻게 보면 음침하게 누군가를 관찰하는 이야기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 보면, 모든 관찰하는 것은 곧 애정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어떤 시처럼 사랑하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하면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이 영화의 도입부, 마그다를 '관찰'하는 토메크를 담는 카메라와 토메크의 시선을 쫓는 카메라는 모두 관찰과 사랑의 어떤 상관관계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시작한다. 이 제시가 가리키는 것은 사랑에는 여러 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관찰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도입부는, 사실 관찰하는 행위보다도 사랑의 이러한, 어쩌면 비윤리적인 부분마저도 포함하는 여러 속성 중의 한 가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가 진행되고 두 번째 장에 들어서면, 이 영화가 사랑의 속성 중 하나로 선택한 '관찰'이라는 행위의 특성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이 영화의 관찰을 관찰하며 떠올린 키워드는 여럿이었는데, 이것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관찰의 특징 중 하나는 수동성이다. 이 수동성은 토메크 그 자체의 캐릭터성으로 환원되기도 했다. 스토킹을 들키고 '무엇을 원하냐'고 따져 묻는 마그다에게, 그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상대방과 거리를 두며 그 선을 파고들지 않는 사랑의 형태, 토메크의 수동적인 사랑을 상징한다. 그에 반해, 토메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보이는 마그다는 토메크와 다른 능동성을 가진 여인이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망원경 앞에 서며, 그 앞에 다른 남자를 끌어오기도 한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토메크는 마그다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 안에 들어가지만, 마그다는 토메크의 초대나 요청 없이도 몇 번이고 그의 집을 방문한다. 마그다의 능동성과 토메크의 수동성 기묘한 균형을 이루며 극을 지탱한다.




  위와 같은 토메크와 마그다의 관계를 다른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그다는 토메크와 대화할 때 특이하게도 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는데, 이는 미성숙한 사랑의 주체가 의인화된 듯한 토메크를 겨냥하는 느낌을 준다. 토메크는 고통과 감정에 둔감하고,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토메크는 사람은 왜 우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해 다른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마그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평가절하당하자 그대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앞 문단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관찰'에서 끌려온 '수동성'이라는 단어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관찰'과 '수동성'은 또 다른 사랑의 형태와도 맞물려 있는데, 이 두 단어에서, 그리고 마그다를 지켜보는 토메크의 사랑에서 공통적으로 떠올려진 것은 '페티시즘'이라는 단어였다. 페티시즘은 어떻게 보면 사랑보다는 취향, 기호의 영역이다. 하지만 사랑에도 어느 정도 기호가 관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성애적 사랑은 모두 취향에 어느 정도 자리를 내어준다. 누군가의 입술 모양, 음악 취향, 말버릇이 좋다는 이유로 사랑은 시작되고 유지된다. 여기서 다시 토메크의 사랑을 떠올려 보자. 마그다와 대화 한 번 한 적 없었음에도 그녀를 사랑한 토메크의 사랑에는 정말 이유가 없을까? 그것보다는 그녀의 외양이, 생활 패턴이 토메크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토메크가 마그다를 사랑하게 됐다는 식의 설명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토메크의 관찰, 관음의 페티시즘을 통해 사랑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담아내면서도 수동적이고 페티시즘적인 사랑이 얼마나 미성숙한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가진 훌륭함은 이전의 결론을 한 번 더 넘어서는 지점에서 빛난다. 초반부, 분명히 토메크에게 사과받아야 할 대상이던 마그다는 후반부 토메크의 사랑을 비웃음으로써 토메크에게 사과해야 마땅할 사람이 된다. 이렇게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설사 누군가에게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것을 조롱할 권리는 갖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적어도 현실이 아닌 영화 안에서는 그렇다.) 또한 결국 작품 후반부에서 토메크를 사랑하게 된 마그다는, 결말에서 망원경을 통한 관찰이라는 토메크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토메크의 방식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누구가 아닌 토메크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의 형태와 방식 중에서 우리는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의 방식으로 그것을 주어야 한다.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는 사랑의 세계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옳은 공식일 것이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교과서적이고 표준적인 사랑의 틀에서 벗어나면서도 동시에 보편성을 가지는 사랑의 단편을 제시했다. '무엇을' 표현했는가에서 '어떻게' 표현했는가로 넘어가 평을 이어가자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분명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영화이다. 토메크가 마그다를 관찰하면서 시작했던 도입과 마그다가 토메크를 관찰하며 끝맺는 결말의 수미상관부터, 적재적소에 맞는 쓸쓸하면서도 감성적인 음악의 사용은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인식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모두 높은 스코어를 달성한, 드물게 훌륭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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