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의 시작

네 번의 이사와, 뜻밖의 연락

by 라피누

수능이 끝나자마자 나는 고모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와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나는 온전히 혼자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다. 학교와 가까우면 친구들 아지트가 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도 그랬다. 그래서 학교와는 조금 먼, 서울 대표 자취촌이라는 ‘신림’으로 향했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지방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고, 서울 물가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나였으니.

(지금은 서울살이 10년 차라 웬만한 시세는 유추 가능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순진했다.)


신림역 주변. 무작정 들어간 부동산에서 본 방은 충격에 가까웠다.

현관을 열면 신발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신발 두 켤레면 가득 차는 입구.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침실 겸 책상이 있고, 주방과 화장실은 경계도 없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모집 방 한 칸에 있던 내 짐조차 다 들어가지 않을 크기였다.

브런치 5화 - 1.JPG 나의 첫 자취방

내 첫 서울살이는 그렇게 4평 남짓한 공간에서 시작됐다.


엄마는 꽉 찬 짐 사이를 둘러보며 계속 한숨을 쉬셨다.

딸이 이런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 설레고 기뻤다.

“드디어, 내 공간이 생겼다.”

비록 좁고 초라해도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급하게 한 단기계약이어서 두 달 뒤 다시 이사를 했다.

월세를 조금 더 보태 언덕 위의 방으로 옮겼다.

다리는 아팠지만 방은 조금 더 넓어졌다.

브런치 5화 - 11.JPG 두 번째 집은 냉장고가 세탁기를 거의 막고 있던 특이한 구조였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늦은 밤,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걸음을 멈추면, 뒤에서도 멈추고. 내가 걸으면, 또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

어떤 남성이 계속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속도를 올려 1층 공동현관을 통과해 계단을 뛰다시피 올라갔다. 도어록을 최대한 빠르게 눌러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따라 들어와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인터폰도 없는 집이라 누군지 확인할 방법조차 없었다.


그날 밤의 공포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만나던 친구가 밤새 옆에 있어주었지만 한동안은 불안했다.


긴 통학시간과 불안한 골목.

더 이상 그 집에 살고 싶지 않았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 부모님의 도움으로 학교 앞 원룸으로 다시 이사했다.

뭐 그 집도 나중엔 전남자친구가 찾아오고 그랬지만... 아무튼. 일 년 사이 세 번째 이사였다.




집 문제가 안정되자 나는 학교 생활에 몰입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난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반장 선거가 있다 하면 늘 빠지지 않고 나갔었으니까. 자퇴로 비어버린 고등학교 시절의 소속감을 그렇게라도 채우고 싶었는지, 대학에선 학생회 활동에 푹 빠져 살았다.

브런치 5화 - 1 (1).HEIC 행사기간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끼니를 때우는 날이 참 많았다


우리 학생회는 늘 바빴다. 축제, 행사, 끝없는 회의...

수업 중간에도 뛰쳐나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매일 늦게까지 남아 사부작대느라 몸은 고단했지만 무언가를 ‘해낸다’는 느낌이 좋았다.


동기들과는 다투기도 참 많이 다투었다. 서로 예민했고, 늘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만큼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그때 지지고 볶았던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낸다.




그렇게 학생회 일과 아르바이트로 정신없이 구르다 보니 어느새 '사망년'이라 불리는 간호학과 3학년이 되어 있었다. 실습과 취업 준비, 알바와 학생회 간부 일까지. 모든 것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시기. 계약 만료로 또다시 네 번째 집으로 이사를 준비할 무렵이었다.


2월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내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유일하게 속을 털어놓았던 친구.

엄마를 함께 설득해 주었던 친구.

내 가장 어리고 미숙한 시절, 나를 붙잡아주던 마지막 중심 같았던 사람.


서울에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나는 거의 생각할 틈도 없이 약속을 잡았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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