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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Oct 13. 2021

인문학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삶의 지혜"마흔의 브레이크"

11. 마흔이라면 한 번쯤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어라!

11. 마흔이라면 한 번쯤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어라!


 “3재(三災)라서 그래! 3년 동안은 재수 없어. 되는 일도 없고.”

 “그럼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3재(三災)가 들어서 그런 건가요?”

 “그래. 3재(三災)가 들면 어쩔 수 없어. 굿을 하면 좀 났지.”

 “굿을 하면 3재(三災)가 없어지나요?”

 “없어지지는 않아. 큰 위험을 줄여 줄 수는 있지.”

 “아, 네.”    


 아프가니스탄 파병까지가 나의 전성기였다. 파병 복귀 후 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무속인을 찾아갔다. 3재(三災)라서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굿 비용이 500만 원이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 나에게 적합한 설루션이 되지 못했다. 그냥 신세 한탄만 하고 온 셈이었다.


 당시 나는 가정불화, 경제적인 문제, 진급 누락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봉급날이 되면 1억 5천만 원의 빚을 갚는다고 모두 빠져나가고 겨우 생활비 정도만 남았다. 아내와의 소통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치아가 흔들려서 수 천만 원의 치료비용까지 든다고 했다.     


 어느 날 혼자 누워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한꺼번에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되려고 전쟁터에 가서 목숨 걸고 싸웠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파병을 가지 않았다면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 것 같아서 더욱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힘껏 풀었다. 그 압력으로 인해 흔들리던 치아 중 2개가 그냥 빠져버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빠져버린 치아의 틈이 내 마음도 뻥 뚫어 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살기도 싫어졌다.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쁜 생각을 했다. 벨트를 풀어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었다. 거기까지 기억난다. 그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만 어떤 기운에 의해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벨트를 끊어 버렸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해도 괜찮았다.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전진이 아니라 멈추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멈춘 상태에서 오직 나를 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던 인문고전을 계속 읽었다. 퇴근하면 곧장 도서관으로 갔고, 주말이 되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책만 보았다.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시련이 누구의 탓도 아닌 내 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기로 했다.     


 지인 중에 암으로 투병하는 K선배가 있었다. 운동도 잘하고 키도 커서 대학 시절부터 여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런 선배가 갑자기 간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언제부터인가 쉽게 피로해지고 식욕도 없어져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했다. 그것도 말기라고 했다. 선배는 억울하다고 했다. 이 좋은 세상에 지금껏 일만 하다가 가게 되었다고 했다. 결혼해서 자식 키우고 회사에 충성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선배 자신을 위해 큰돈 한번 써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간암 진단이 내려지기 전에 K선배가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큰돈을 쓴 적이 있었다. 차를 바꾸었는데 ‘그랜저’를 샀다. 요즘은 국민 차급으로 많이 타지만 예전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타는 차였다. 그런데 딱 2개월 타고 암 투병으로 세워놓았다. 어쩌면 병원비로 인해 다시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걸 알았다면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썼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병원비용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대출이 절반인 아파트도 팔아서 전세로 옮겨야 했다.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배, 보험 든 거 없어요?”

 “있는데 사실은 지금이 두 번째 수술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보험회사에서 처음 수술비용만 지원해주고 재발하면 지원금이 없어. 특약을 들지 않으면 지원해주지 않아.”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성질내지 말고 네 꺼도 잘 살펴봐. 보험약관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            


 나는 집으로 와서 보험 약관을 살펴보았다. 정말 그랬다. 40대는 아파서도 안 되는 나이인가 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K선배는 왜 자기한테 그런 몹쓸 병이 왔는지 하늘을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40대에 건강을 잃으면 일단 억울하다고 했다. 평소 건강관리에 신경 쓰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라고 했다.


 K선배는 아이들 결혼시키고 나면 아내와 둘이서 세계여행을 가려고 계획했었다. 그걸 못하게 된 것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돈 너무 아끼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투자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래야 나중에 잘못되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K선배는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가장을 잃은 가정에는 쓰나미가 지나간 폐허만 남은 것처럼 처참했다. K선배는 인생의 쉼표도 없이 앞 만 보고 달렸었다. 그리고 암에 걸렸다. 재충전을 위한 쉼표가 아니라 영원한 쉼표가 되어 버렸다. 40대에는 이런 사연이 드물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인생의 쉼표가 필요한 나이다.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고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인생의 쉼표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K선배를 떠나보내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지금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는 중이다. 그동안 남 탓을 하느라 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문득 다산 정약용이 생각났다.     


 다산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였다.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고 화성 설계와 거중기를 제작한 학자이다. 정조 임금과 조선 후기 개혁을 추진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정조 사후 그의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몰락했다. 다산은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고 그의 셋째형 정약종은 처형을 당했다. 다산이 처음 유배를 갔을 때 그를 받아 주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가난한 떡장수 노파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다산의 처참한 유배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을 정도다. 그래도 다산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공부를 게을리했는데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나는 마흔 초반에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소위 말하는 3재(三災)가 내게 든 것이다.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모든 게 망가지고 있었다. 나는 멈춤 속에서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K선배가 그랬고, 다산 정약용이 그랬다. 나의 시련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산은 무려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견디며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철저히 나를 분석해보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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