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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Feb 13. 2024

좋은 시간, 나쁜여자(11)

11. 집착말고 연애만(1.시절인연)

11. 집착말고 연애만(1. 시절인연)     

정호의 지방 출장으로 수정은 간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주일. 결혼하고 처음 갖는 분리된 시공간 속에 서로의 존재감은 빈자리보다 자유가 더 컸다.

‘이 인간 분명히 딴짓하러 간 거야. 여자의 촉은 과학이거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래. 어쩌면 그이의 일탈이 나에게 면죄부를 주는 기회가 될 수 있어. 그래도 어떤 년인지 궁금하기는 하네. 아니야. 알아서 뭘 해. 어차피 이젠 얘들 아빠로 말고는 특별한 의미는 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법적 테두리를 벗어던지지 말고 각자 자유롭게 살면 돼. 그러기 위해서는 그이가 바람을 피우든지 말든지 상관 말자. 아니, 알면서도 이해해 줄 테니까 내 연애에도 참견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확실하지. 물론 이혼을 요구하면 못할 것도 없고. 얘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수정은 언제부터인가 남편 정호의 얼굴이 보기 싫어졌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평생 매력을 느끼며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보기 싫어질 정도로 부부 사이가 멀어진 원인이 뭐였을까? 이성적으로 끌리는 다른 남자가 생겨서일까? 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라면 수십 번도 더 이혼했을 것이다. 쇼핑몰 사업이란 게 잘생긴 모델들, 말 잘하는 쇼호스트 등 그녀의 주변에 널린 남자가 모두 매력 덩어리들이었다. 남편 정호와 결혼할 때 수정은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하는,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연애를 했었다. 안정감 있고, 다정한 정호의 성격이 그녀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는 자신이 잘한 선택이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기숙사로, 군대로 떠나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남편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처음에는 오붓하게 좋았는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남편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주말에 둘이 식탁에서 밥 먹을 때 밥 씹는 소리마저도 신경에 거슬렸다. 경제적 자유를 주었는데도 그것에 대한 감사는커녕 쇼핑몰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도와주지 않았던 사실들, 착실하게 돈을 모았으면 어느 정도 목돈을 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다 부실하고 이기적인 밤일까지, 뭐 하나 만족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남은 인생을 이 남자와 보내야 한다면 난 돌아버릴 거야. 그렇다고 얘들 아빠인데 버릴 수도 없고. 내 인생을 생각하면 분명히 ‘아니올시다.’인데 참 어렵다. 이 나이에 내가 이런 고민을 할 줄이야.’ 수정은 인생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수정의 환경은 남이 볼 때 ‘행복한 가정의 표본’이라고 생각될 만큼 완벽했다. 하지만 수정이 느끼기에 행복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행복할 때는 남편과 아이들로 인한 것보다 그녀가 일에 집중할 때였다. 매출 목표를 초과해서 달성하고 새로운 아이템이 대박나고, 난관에 봉착한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때 더없이 행복했다. 그녀의 행복은 성취감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최근 들어 느끼는 행복의 결핍이 있었다. 여자로서 느끼고 싶은 사랑이었다. 회사 대표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완벽한 역할은 그녀를 여자가 아닌 남이 보기에 좋은 포장지 껍데기처럼 생각되었다.      

어느 날 수정은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종이에 썼다. 

‘백,수.정.’

거기에는 본질은 없고, 회사 대표, 누구 엄마, 누구 아내…. 껍데기만 있었다. 오롯이 한 여자로서 백수정은 없었다. 수정은 여자라서 행복한 이유를 찾아봤다. 여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어떤 존재인가? 옛날 TV광고에 가전제품을 바라보며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행복해 하는가정 주부의 모습이 생각났다. 마음에 드는 가전제품 하나를 사서?, 좋은 집과 예쁜 옷을 사서?, 일찍 퇴근하는 남편을 보며 밝게 웃으며 맞이하는 아내라서? 한때는 수정도 그런 이유로 인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사지 못할 때는 불행하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건 여자라서 행복한 게 아니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환경이 주는 만족감일 뿐이었다. 

‘여행, 그래. 나도 휴식이 필요해. 나를 옭아매고 있는 틀을 벗어나면 머리가 맑아질거야.’

수정은 계획없이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껏 살아 온 패턴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수정은 전신거울 앞에 섰다. 탄탄한 몸매, 가냘픈 허리라인, 긴 생머리까지 아직 젊음이 가시지 않은 자신을 보며 웃었다.     

디리리릭, 디리리릭.

수정의 핸드폰이 울렸다. 홈쇼핑 김 피디였다. 한때는 수정의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남자.

“여보세요. 김피디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밤 열 시면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기에 늦은 시간이었다.

“백 대표. 급하게 제주도 출장을 가야 하는데 나 좀 도와줘라. 내가 오죽 급하면 이 시간에 전화했겠냐?”

“무슨 일인데, 다짜고짜 뭘 도와달라는 거야?”

김 피디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

“내일 중년 콘셉트 봄 신상 촬영이 제주도에서 계획되어 있는데 모델 한 명이 사고로 펑크를 냈어. 그런데 백 대표가 딱 적임자야. 솔직히 지금 다른 모델 구하는 것도 어렵고. 한 번만 도와줘라. 수정아.”

수정은 여행을 가려던 생각과 제주도라는 말에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뭐, 정 사정이 그렇다면 도와줄게. 몇시 비행기야?”

“아침 일곱 시 첫 비행기야. 네가 허락해줄 걸 알고 표는 미리 예약했어. 고마워 수정아.”

김 피디는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좋아했다.

“야, 김피디. 넌 늘 뭔가 부탁할때는 내 이름을 부르더라. 거절하지 못하게.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 자꾸 개입시키면 곤란해.”

“하하하하, 천하의 백수정, 아직 안 죽었네. 그래 알았다. 넘 무섭게 그러지 마라. 그래도 너 힘들 때 나 진짜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다. 하하, 내일 아침에 보자. 5시 30분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수정의 쇼핑몰 사업이 어려웠을 때 남편보다 김 피디가 더 도움이 되었었다. 그런 김 피디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 제주도 촬영 도와주고, 한 며칠 지내면서 머리좀 식히고 와야겠다.’

수정은 어린아이 소풍 전날처럼 입고 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디리리릭 디리리릭

김 피디가 전화했다.

“어, 김 피디. 도착했어? 금방 내려갈게.”

수정은 피난이라도 가듯이 대형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나왔다.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 하얀 면티에 짧은 가죽 자켓, 그리고 선글라스. 긴 머리리는 감아올려서 큰 집게머리핀으로 고정시켰다. 그런 수정의 모습을 보고 김 피디가 차에서 내려 수정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이, 백수정. 어쩌면 대학다닐 때 모습 그대로냐? 멀리서 보는 순간 마음이 심쿵해지더라 야.”

수정은 김 피디의 말에 썩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호, 어디서 개수작이야. 가방이나 받아줘.”

수정은 노룩 가방 투척, 도도한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하여간 저 성질머리하고는. 뒤에 짐 실려 있으니까 앞에 타.”

김 피디는 수정의 트렁크를 차에 싣고 운전석에 탔다.

“자, 안전벨트 해주시고, 출발합니다.”

“김 피디, 자세한 스케줄에 대해 알려줘야지. 이건 무턱대고 도와달라고 하고 스케줄도 안 안알려주면 납치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란 거 알지?”

수정은 신입생 첫 미팅에서 만난 김 피디, 아니 김기태의 우물쭈물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무도 김기태가 홈쇼핑 피디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남 앞에서 당당하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기태가. 피디가 되다니.

“자, 제주도 촬영 스케줄 보고 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알았어. 보고해봐.”

김 피디는 수정을 한 번 쳐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오늘은 촬영 첫날이며, 일곱시 비행기를 타고 여덟시에 제주공항에 내려서 기다리는 밴을 타고 첫 촬영지 성산포로 갑니다. 거기 가면 스텝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스텝들은 어제 제주도에 도착해서 촬영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수정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촬영장으로 간다는 소리에 김 피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땜빵 모델이라고 해도 촬영 콘셉트는 미리 알려줘야 나도 준비를 하지. 이거 프로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야, 백수정. 나는 왜 너 앞에만 서면 작아질까? 넌 너무 쎄서 탈이야.”

“호호. 내가 쎈게 아니라 네가 약한거야.”

“그런가? 하하하하.”

둘의 웃음소리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20대로 돌아 간 웃음이었다. 수정도 모처럼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봄 신상 콘셉트라는 거지? 유채꽃 앞에서 찍겠네? 그럼 노란색과 잘 어울리는 화사한 톤이 필요할 텐데.”

“그건 걱정마. 전문 코디들이 알아서 해줄테니까. 그리고 중년 여성 모델은 너 혼자니까 잘 해줘야 돼. 이번 건 잘되면 너희 쇼핑몰도 크게 도움이 될 거야.”

수정은 김 피디가 편했다. 그가 하는 말에 그 어떤 눈치나 신경쓰임 없이 받아줄 수 있었다. 대학시절 순박한 모습으로 여자 손도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보던 김 피디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백 대표, 왜 자꾸 웃는거냐? 너 그러다가 나 좋아한다고 말하면 곤란해.”

“호호호, 너 나 감당할 수 있어?”

“나 예전의 김 기태 아니다. 홈쇼핑계 제일 잘나가는 김 피디야. 괜히 예전 감정 살려서 나한테 빠지고 그러지 마라. 네가 나한테 빠지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하하.”

“호호호. 그래 안 빠질게. 근데 너 확실히 달라졌어. 믿음직해. 옛날에는 내가 널 보호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호호. 가끔 남자로 보이기도 해. 호호호.”

수정은 얼떨결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웃으면서도 나대는 심장을 애써 숨기려고 했다.

‘뭐지, 이 느낌. 20년의 세월을 돌아서 다시 만난 기태가 나의 시절인연일까?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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