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렇게 아팠을까
나는 작년에 친정엄마와 약 10개월 정도 함께 살았다. 육아를 돕기 위해 오셨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집은 전쟁터였다. 엄마는 24년 경력의 구몬 선생님이었다. 아이의 식사, 낮잠, 놀이, 말투, 생활 습관, 우리 부부의 루틴까지— 엄마는 모든 것을 세세히 관리했고, 나는 매일 지적당했다. 어릴 적 엄마의 완벽주의 아래에서 공부하며 지낸 기억은 단단하게 굳은 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 한마디면, 어른이 된 나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늦은 갱년기를 겪고 있었고 나는 계획에 없던 셋째를 임신하며 호르몬 기복이 극심해졌다. (아이는 결국 유산되었다.) 우리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와 금명처럼, 서로를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
학교 업무, 육아 스트레스, 엄마와 함께 지내며 눌린 긴장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진 날,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절규했다. 그 순간 비로소 내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얼마나 나약해졌는지 알았다. 결국 엄마는 나와 큰소리로 싸우다가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짐을 싸서 나가셨다. 아이들도 외할머니와 엄마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힘들어했다. 나는 엄마랑 싸운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가 하염 없이 걷다가 친구 집에서 밤늦게 돌아오곤 했다. 남편도 장모님 앞에서는 편히 쉬지 못해 쉬는 날마다 차 안에서 낮잠을 자며 버텼다.
“내가 너를 도우러 왔는데, 너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다. 이럴 바엔 내가 없는 게 낫겠다.”
엄마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이사하던 날, 한번 안아보자며 나를 꼭 껴안았지만 나는 기운이 빠져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엄마가 셋째 아이를 ‘지우라’고 말하며 화를 내던 순간이 유산의 상처와 겹쳐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새 학교로 옮긴 뒤, 엄마에 대한 감정은 서서히 풀렸다. 엄마는 여러 번 그때 일을 사과하셨다. 엄마 성격상 “그땐 네 체력이 약해서 셋째는 무리였을 거야”라고 말하는 게 최대한의 사과였다. 나도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친정집에 둘째가 태어나고는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 아이들이 차에서 오래 있으면 힘들다는 핑계였다.
얼마 전, 술기운이 오른 아빠가 손녀들을 보고 싶다고 하실 때 나는 충동처럼 말했다. “이번 주말에 갈게요.” 부모님은 놀라셨지만 곧 기뻐하셨다. 나는 금요일 공개수업을 마치고 쉴 틈도 없이 토요일 아침, 아이들을 챙겨 친정으로 향했다. 아빠는 새벽부터 시장에 가셔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샤인머스캣을 사오셨지만 쑥쓰러우셨는지 도착 전에는 “너무 추우니 다음에 와라”라며 염려도 하셨다. 오랜만에 가본 친정에서 근처 농장에서 체험도 하고 저녁은 외식으로 함께 먹고 오랜만에 가족 같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아이들과 놀다가 문득 엄마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오래된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15년 전 내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작은 유화였다. 장미꽃 향을 맡는 엄마의 옆모습을 그린 그림. 아이보리색이던 배경은 이제 연갈색으로 바랬지만, 엄마는 그 그림을 언제나 방 한가운데 걸어두고 계셨다.
우리가 매일 부딪히던 그 시절에도, 아빠 집으로 이사해 나와 마음이 멀어졌던 때에도, 그 그림만큼은 한 번도 치우지 않으셨다. 그 사실이 나를 흔들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그림이 자꾸 떠올랐다. 엄마는 나에게 모진 말을 할 때조차 늘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셨던 사람이라는 걸 그제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림 속 엄마는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늦게야 그 마음을 읽었다.
그 사실이 미안했고,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엄마의 조용하고 한결 같은 사랑에 나는, 오래도록 가만히 누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