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평가 가치

조선의 과거시험과 현재의 논술전형

by EchoBridge

공부하고 책을 보며 다양한 학생과 학부모들을 상대하는 일이 누적되다 보니, 언젠가부터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었다.

어릴 때 글짓기대회에서 상장 꽤나 받아본 나에게 글 쓰는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막상 뭔가라도 써보자는 하는 애씀 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애써서 뭔가를 쓸 생각은 접어두고 그냥 다른 글들을 더 읽었다.

관심분야의 다양하고 많은 생각들을 읽으면서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워서 정리도 하고 필사도 하며 꽤 많은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그러던 중 대학 입시를 지도하면서 여러 전형 중 하나인 논술전형에 대해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내신이나 수능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논술 100% 전형이 있을 만큼 짧은 시간에 쓴 글만으로 우수한 인재를 뽑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성적이 중요한 대한민국 입시판에 성적을 안 보고 글만 보는 전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참고로, 논술전형으로 선발하는 인원은 적은 편이지만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고, 대학에 따라 내신성적을 반영하거나 수능최저를 충족해야 하는 경우도 있음)


그러다가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이 딱 그런 제도였다는 혼자만의 깨달음을 얻었다.

질문은 하나고 제한된 시간에 쓰는 글이지만 답을 제시하기 위한 방대한 선지식을 인출해 낼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의 의도와 방향에 맞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런 글이 과거시험이었을 터.

그렇다면 지금의 논술전형도 선발하고자 하는 인재의 요건들이 반영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그것에 부합되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납득이 되었다.

평가로서의 단점(한 번의 글로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역에 대한 그 사람의 지식과 생각의 깊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글이라는 수단이 가치 있는 평가기준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점수에 혈안이 되어서 시험지를 빼돌리고, 점수를 조작하고, 점수만을 위한 편협하고 얕은 암기로 만들어진 성적보다는 이런 논술전형이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이를 더 잘 판단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 글쓰기는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기를 소개하는 자소서나 에세이를 쓸 때도 소스만 던져주면 AI가 내가 되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듯하게 포장해 준다.

이 시대의 글쓰기는 이전의 글쓰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이 시대에 글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여전히 가치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평가 수단으로써의 글은 오히려 AI가 배제된 영역에서 진짜배기를 가려낼 좋은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고, AI와 협업하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확장된 글로서의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가 변해도 글쓰기는 본질은 같길 바란다.

그것이 사용되고 표현되는 방식은 달라질지라도 지식과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 사유의 표출이라는 의미로의 글은 그 자체로 보존될 것이다.

오히려 대입제도에 논술전형이 살아 있다면 최소한 글쓰기의 가치와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과 자신의 생각이 글이라는 수단으로 정리될 때 써진다.

많은 재료들이 쌓여서 합쳐지고 분해되어 내 것이 되었을 때 새로운 무언가로 정리되어 글이 된다.

머릿속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끄집어내어 정리된 문장들을 써보지 않으면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채 AI에게 생각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우리의 아이들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자신만이 생각을 펼치는 경험이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포함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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