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의 실각
베르뎅 전투를 이해하려면 몸통인 1차 대전의 발발 원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차 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의 동맹국이 싸움을 벌인 첫 번째 세계 대전이다. 나중에 미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2차 대전과 달리 일본은 연합군 편에 섰다.
당초엔 세계대전으로 불렸으나 2차 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과 구분하기 위해 1차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전쟁 종료 후 유럽과 세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4개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이 해체됐고 UN의 전신인 국제연맹이 만들어졌다.
1차 대전의 원인을 알아보려면 유럽 근대사를 통으로 헤집어야 한다. 이는 아마존 강의 시원을 찾는 일 만큼이나 거대한 탐험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생략하더라도 최소한 독일 통일을 이룬 비스마르크부터 시작해야 한다.
독일은 19세기까지 수 십 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분리되어서는 큰 힘을 쓸 수 없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산업혁명과 식민지 확보경쟁에도 뒤질 수밖에 없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통상 보불전쟁·1870-1871년)을 승리로 이끌어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어렵게 통일을 이루었으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독일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서부(프랑스)와 동부(러시아)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독일에게는 두 개의 전선을 한꺼번에 감당할 힘이 없었다. 일 대 일이면 어느 나라와도 자신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둘 중 한 나라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우려는 1,2차 대전을 통해 현실로 드러났다. 결국 두 개의 전선이 형성돼 그의 염려는 악몽으로 바뀌었다.
독일은 늘 영국을 라이벌로 여겼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오랜 기간 패권국으로 군림한 나라다.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둔 영국은 되도록 유럽 내부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섬나라여서 다른 나라와 국경을 맞대지 않은 영국은 ‘나 혼자 잘살면 그만’이라며 그들만의 고고함을 누렸다.
왕정이 없어진 프랑스를 제외하면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영국은 이래저래 왕실끼리 혈연으로 얽혀있었다. 그러니 더욱 그들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영국은 유럽 여러 나라를 상대로 ‘영예로운 고립’을 선택했다. 그 편이 훨씬 실속 있었다. 2020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단행한 영국의 심리적 배경과도 연결될 수 있는 대목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전문가답게 동서고금의 가장 유력한 방식으로 독일의 난제를 극복하려 했다. 이른바 ‘원교근공(遠交近攻)’이었다. 멀리 있는 나라(러시아)와는 동맹을 맺고 눈앞의 프랑스는 힘으로 몰아 붙였다. 비스마르크 외교의 최종 목표는 프랑스의 고립이었다.
독일은 나폴레옹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했다. 비록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되갚아 주긴 했지만 프랑스 육군은 여전히 유럽 최강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땅만 넓었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줄타기 외교를 벌여 통일 독일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변덕스런 빌헬름 2세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사정이 급변했다. 새 황제는 독일의 외교 정책을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시켰다. 이탈리아 축구에서 브라질 축구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불만을 표시했다. 새 황제는 눈에 가시였던 비스마르크를 퇴임시켰다. 닥치고 공격을 추구한 황제는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공격은 수비보다 배나 체력 소모가 크다. 독일에겐 무리한 벌크업이었다. 독일이 덩치를 키우자 이번엔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맺었다.
독일에겐 뼈아픈 외교적 손실이었다. 한창 몸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던 빌헬름 2세는 커져가는 자신의 근육에 도취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간과했다. 보불 전쟁 승리이후 독일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해 무서운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룩해가고 있었다. 근육이 커지자 점점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됐다.
독일의 이런 변화를 유럽 여러 나라들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1908년부터 1차 대전 직전인 1913년을 전후해 유럽 제국은 저마다 50% 이상 국방비를 늘려갔다. 너도 나도 격투기 수업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싸움판이 벌어질 만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발칸반도였다.
그곳이 유럽에서 가장 화기에 취약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발칸반도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여러 인종, 종교, 국가가 뒤엉켜 있었고, 유럽의 덩치 큰 제국들은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다했다.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종주국이었다. 오스트리아는 20세기의 중세로 남아있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합스부르크왕가라는 봉건 왕조를 유지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헝가리 황제를 겸했다. 세르비아는 헝가리의 제후국이었으니 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세르비아로 구성된 피라미드의 정점이었다.
20세기 초 발칸반도라는 사각의 정글 주변에는 두 명의 헤비급 복서가 버티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슬라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러시아였다. 최근까지 이곳의 지배자였던 오스만 제국의 체급은 미들급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도 순순히 뒷전으로 물러서려 하진 않았다. 강대국끼리의 몸싸움에 인종, 종교 문제까지 뒤엉켜 발칸이라는 화약고는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스만은 이슬람인데 반해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러시아는 정교였다.
발칸 반도 내의 종교 분포도 덩달아 복잡했다. 세르비아는 오래 동안 오스만 제국 아래 있었지만 주민 대부분 정교를 믿었고, 크로아티아인의 대다수는 가톨릭인 반면 1차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린 보스니아는 이슬람 40%, 정교 30%, 가톨릭 15%의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화엄경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時方)이라는 경구가 있다. 작은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의미다. 우주가 130억 년 전 작은 점에서 비롯돼 팽창했다는 ‘빅뱅이론’과 맞닿아 있다.
1차 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사건 역시 한낱 작은 일에서 비롯됐다. 세계대전(世界大戰)까지 비화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 그랬듯 여러 개의 우연이 모여 뜻밖의 필연을 만들어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세르비아계 청년 암살단 6명이 그를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과 세르비아인은 슬라브 민족의 피를 공유했다. 오스트리아는 그들과 엄연히 구분된 게르만족이다.
암살단은 첫 번째 기회를 놓쳤다. 두 번째로 그들 중 누군가 황태자의 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애꿎은 구경꾼 몇 명만 부상 입히는 데 그쳤다. 황태자의 차는 신속히 현장을 벗어났다. 경호 원칙에 따르면 황태자는 즉시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강한 면을 과시하고 싶었다. 약한 사람은 의외의 대목에서 불쑥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는 반쪽짜리 황태자였다. 황실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우겨서 강행한 대가였다. 평민 여성과 결혼하는 대신 자식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니 권력의 절반만 가진 물 황태자였다. 그는 황실 내부의 따가운 시선을 무던히 참아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기회가 되면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었다.
황태자는 남은 일정을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격론 끝에 노선을 살짝 변경하는 선에서 수행원들과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한 운전기사는 원래 예정된 길로 가고 있었다.
수행원들이 기사에게 급히 차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황태자와 부인을 태운 차는 큰 길에서 천천히 후진을 했다. 차를 돌리기 위해서다. 하필 그곳에 암살자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비극은 기막힌 우연에서 비롯됐다.
암살자는 황태자와 부인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