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1,2차 대전과 스페인내전, 한국전쟁, 월남전, 중동전쟁, 아프리카의 숱한 내전들…그리고 냉전.
21세기가 되면 전쟁은 멈출 줄 알았다. 백년이 지나면 좀 더 현명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도 인간은 자신들의 최대 발명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같은 종을 향한 증오의 총질은 호모사피엔스가 존속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인들은 더 이상 전쟁이 없을 줄 알았다. 보불전쟁(1870-1871년)이후 유럽에는 꽤 오래 전쟁이 없었다. 총성이 사라진 채 40년을 지내자 그들은 안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들은 몰랐다. 이전에 없던 거대한 살육의 파도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줄.
1차 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은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인류가 스스로에게 해댄 무참한 총질이었다. 오직 호모사피엔스만이 가능한 자신의 종(種)에 대한 대량 학살(genocide)이었다. 제노사이드는 인종(genos)과 살인(cide)이 결합된 단어다. 세계를 정복한 후 한껏 기고만장해진 서양문명에 가해진 역사의 회초리였다.
대항해시대와 식민지 개척, 산업혁명을 거치며 포악해진 서양문명은 제국주의라는 변종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를 차례로 수탈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무한 팽창을 노렸다.
1920년에 이르러 서양 문명은 전 세계 육지의 절반을 지배했다. 쓸모없는 땅을 제외하면 지구 표면의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400년 전에만 해도 그들의 힘이 미치는 지역은 고작 3%에도 미치지 못했다.
18,19세기 유럽의 팽창 속도는 빅뱅을 연상시켰다. 18세기는 유럽의 디딤판 이었다. 대포와 총기로 무장한 그들의 범선은 전 세계 해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아편전쟁(1차 1840-1842년, 2차 1856년-1860년)을 통해 동양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유럽은 전 세계 바다를 독점했다. 그들의 19세기는 자랑스러웠고, 20세기는 더욱 찬란히 빛날 것 같았다. 음울한 세기말적 분위기는 예술가들의 고질적인 허무주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마냥 빛날 것만 같던 유럽의 20세기는 역사에 유례없던 세계대전(大戰)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올렸다.
과학의 발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은 대량학살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뜻밖의 반전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1차 대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전쟁의 광기는 4년 남짓 기간 동안 무려 38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죽은 군인의 숫자는 900만 명이나 됐다.
흑사병 이후 최대의 재앙이었다. 14세기 유럽을 집어삼킨 흑사병은 대략 2천 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당시 유럽 인구의 ⅓이 흑사병으로 죽어갔다. 흑사병은 자연과 관련된 것이어서 신의 심판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은 분명 인간 스스로 부른 참화였다.
전쟁의 발단은 유럽의 변방 발칸 반도에서 시작됐다. 발칸반도는 유럽에 속한 땅이지만 오래도록 이슬람 깃발을 내건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그곳은 민족, 종교, 언어, 정치라는 인간 종(種)만이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늘 지배와 반 지배가 이어져 왔다.
불씨 하나라도 떨어지면 금세 온 산을 태울 것처럼 바짝 마른 상태여서 ‘유럽의 화약고’라 불렸다. 그 화약고에 실제로 불씨 하나가 뚝 떨어졌다.
1917년
‘1917’(샘 멘데스 감독)은 관객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영화다. 극적인 전개나 감동은 적지만 전쟁에 대한 거부감만큼은 어느 영화를 보았을 때 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를 본 느낌은 잔혹함 보다 참혹함에 더 가까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해변 상륙신이 적나라했다면 ‘1917’은 전쟁의 민낯을 보다 충실히 재현해 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더 충격적이었다.
1차 대전 서부전선의 파스샹달 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1917’은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해 관객을 전장 속으로 빨려 들게 만들었다. 편집의 기교를 배재한 채 배우들과 함께 전쟁터를 달려가는 듯 생생한 느낌을 전달했다.
007시리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스카이폴’을 연출한 멘데스 감독의 작품으로 2020년 제 92회 아카데미에서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음향효과상 등을 수상했다. 감독상과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밀렸다.
‘1917’은 ‘콰이강의 다리’(데이비드 린 감독), ‘디어헌터’(마이클 치미노 감독), ‘플래툰’(올리버 스톤 감독), ‘라이언 일병 구하기’(스티븐 스필버거 감독) 등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5대 전쟁 영화로 손꼽힌다.
이 전쟁영화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공통 정서는 광기다. 인간은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지르기 힘든 잔혹 행위를 태연하게 범한다. 제정신인 상태서 어떻게 목 베기 게임 같은 광기를 표출할 수 있겠나.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군 장교 무카이와 노다 두 사람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난징에서 ‘100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느냐’는 참담한 게임을 벌였다. 이 둘은 각각 106명과 105명을 살해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들의 만행을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한 당시 일본 신문들이었다.
베르뎅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 많은 희생을 치른 전투로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베르뎅 전투(1916년 2월-12월)는 광기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약 10개월, 날짜로는 302일간 치러진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군은 6천만 발이라는 어마어마한 포탄을 서로의 머리를 향해 쏟아 부었다. 베르뎅이라는 작은 지역에 날아든 숫자다.
전투는 프랑스 동북부를 관통하는 뫼즈 강과 베르뎅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강의 동쪽과 서쪽에서 요새를 빼앗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다. 뫼즈 강은 역사적인 도시 베르뎅을 동서로 양분하며 흐른다.
베르뎅은 인구 1만 7000명의 작은 도시다. 프랑크왕국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세 나라로 나눈 베르뎅 조약이 843년 이곳에서 체결됐다. 유서 깊은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영화 ‘1917’에서 볼 수 있듯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진흙 더미 아래 파묻힌 시체들이 공중으로 치솟은 후 봄비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 장면을 보고 온전히 정신을 붙잡고 있긴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뎅 전투에 참가한 한 프랑스 장교는 “지옥도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다”고 종군일기에 남겼다.
베르뎅 전투 개전 첫 날 하루 양군은 100만 발의 포탄을 일시에 소모했다. 공업화로 인해 급격히 향상된 생산력은 살인이라는 장르로 특화됐다. 오만이 가져다 준 인재(人災)는 21세기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재앙과 유사했다. 두 눈을 가린 이성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 지 보여준 참극이었다.
1차 대전은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으로 일컬어진다. 개전 초기만 해도 마차는 여전히 군대의 수송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말 탄 기병들이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은 곧 탱크, 잠수함, 전투기, 독가스라는 새로운 무기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베르뎅 전투에서 사망한 독일과 프랑스 양군의 군인 수는 71만 4231명에 달한다. 부상자는 그 몇 배다. 10달 동안 매달 7만 여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꼬박꼬박 죽어나갔다. 한 달에 도시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그들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1차 대전은 결코 고상한 전쟁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대체 무엇이 이성적으로 자부하던 유럽인들을 광기로 몰아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