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과 네바강 3

by 성일만

레닌


겨울궁전은 무혈입성을 허락했다. 하지만 새로운 지배자들은 그에 합당한 신화가 필요했다. 고난의 신격화를 통해야 비로소 지배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새 왕조는 먼저 천명(天命)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렸다. 혁명가들은 고난을 통해 천명을 확인시키려 했다. 소련에서 제작된 영화는 예외 없이 당시 겨울궁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차르 세력의 최후 저항이 결렬할수록 그들의 혁명 의지는 더 공고해진다.

혁명가는 이론가와 결이 다르다. 마르크스가 후자라면 레닌은 전자였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유대인의 피를 이어 받았다. 레닌은 모계, 마르크스는 부계 쪽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세 인물이 유대계라는 점은 흥미롭다.

레닌의 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다. 레닌은 차르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이 점은 박정희와도 유사하다. 박정희가 가장 좋아했던 셋째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 10.1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그로부터 6년 후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25살이 되던 해 레닌은 비밀경찰에 체포돼 2년 간 시베리아 유배를 경험했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기간이었다. 레닌은 이 때 만난 여성과 결혼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30살이 되던 해 차르의 탄압을 피해 독일로 망명을 떠났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그를 더 이상 망명지에서 머물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레닌은 조국 러시아로 돌아 와 총 파업을 선동하며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혁명가로서 레닌의 정점은 1917년 10월이었다. 겨울궁전 함락 다음 날인 10월 26일 인민위원회는 레닌을 지도자로 받들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인민위원회 대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혁명은 언제나 반혁명이라는 저항을 수반하게 된다.

볼셰비키의 중심 세력은 도시에 몰려 있었다. 볼셰비키는 격렬한 시가전 끝에 제 2도시 모스크바를 장악했지만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그들의 영향력 하에 두진 못했다. 그런 가운데 11월 12일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에 이어 2위로 밀려났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을 지지했다. 레닌은 의회를 해산하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후부터는 레닌의 독주시대가 시작됐다. 망치와 낫이 그려진 구소련 국기를 도입했다. 아울러 토지를 비롯한 모든 사유 재산을 국유화했다. 레닌은 1918년 7월 16일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을 처형시켰다.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유럽 국가들이 시선에 점점 당혹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체 저들은 무얼 하려는 걸까. 마침내 1918년 1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이 무렵 레닌의 가장 큰 근심은 강대국 독일이었다.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보낸 레닌은 독일의 군사력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에 의해 갓 출범한 공산주의 국가가 위협 받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레닌이 독일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이유다. 대가는 우크라이나와 발트삼국 등을 포기하는 조건이었다. 팔의 일부를 잘랐지만 목숨은 보장 받았다. 이로써 독일로부터의 위협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조약은 두고두고 레닌을 발목을 잡았다.

발끈한 반대파들은 레닌을 암살하려 들었다. 총상을 입은 레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이후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은 결국 그의 조국을 내전으로 이끌었다. 모든 내전이 그렇지만 러시아 내전 역시 끔찍했다. 서로를 부정하는 무리들은 격렬하게 싸웠다. 당시 9천 만 명의 러시아 인구 중 1500만 명이 희생됐다.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세력은 백군(白軍)으로 불렸다.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 즉 적군(赤軍)과 복장부터 뚜렷이 구분됐다. 그들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하얀색 군복을 입었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혁명에서 내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주인공 라라의 남편이 백군 사령관이다. 백군은 유럽 열강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로인해 적군으로 하여금 ‘외세의 앞잡이’로 찍혔다. 적군의 주요 배경은 도시였던 반면 백군은 주로 농촌 지역에 지지 기반을 두었다. 미국의 남북전쟁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공업 생산력에 의지한 적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내전은 4년 여 동안 계속됐다. 1922년 내전이 종료됐지만 이후로도 국지적인 전투는 이어졌다. 그해 12월 소비에트연방이 결성됐다. 연방은 1992년 12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되면서 해체될 때까지 70년 동안 지속됐다. 소비에트연방은 이제 구소련으로 불린다.

레닌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924년 1월 21일 과로와 총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겨우 54세였다. 그의 죽음 이후 스탈린의 집권 과정은 흡사 진시황 사후를 연상시킨다. 마치 장편 역사드라마 같았다.

레닌과 진시황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하나는 일중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진시황은 레닌처럼 일밖에 몰랐고, 늘 암살 위협에 전전긍긍했다. 그는 많은 나라들을 멸망시켰다. 죽인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만큼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불사(不死)를 염원했다. 도사(道士)에게 수은을 통한 불로장생 비법을 익혔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사망 원인은 수은 중독으로 인해서였다. 진시황은 고작 쉰 살에 죽었다. 그의 유서는 늘 곁을 맴돌던 환관 조고에게 먼저 전달됐다. 레닌의 유서 역시 그의 비서의 손에 맨 먼저 주어졌다.

그 과정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조고는 황제의 유서를 조작했다. 유서에 의해 차기 황제로 지목된 유능한 장남 대신 자신의 손 안에서 마음껏 쥐락펴락할 수 있는 호해를 그 자리에 앉혔다. 레닌은 스탈린을 경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유언장은 금고에 꽁꽁 숨겨둔 채 공개되지 않았다.

레닌은 독재자 기질이 다분한 스탈린 대신 집단 지도체제를 원했다. 유언장을 손에 넣은 스탈린은 내용을 숨겼다. 그런 다음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철권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나중에 알려진 레닌의 유언장에는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 그보다 뛰어나진 못할지 모르나 더 참을성 있고, 진실한 동지에게 그 자리를 맡겨야 한다. 이는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나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진시황과 레닌의 무지막지한 권력은 사후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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