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는 두 종류의 전쟁이 있었다. 열전(熱戰)과 냉전(冷戰)이었다. 1,2차 대전과 한국전쟁, 중동전쟁, 베트남전은 열전이었다. 전쟁 수행능력은 빠른 속도로 향상됐다. 20세기 초엔 총포가 머리 위를 날아다녔지만 중반엔 비행기에서 원자탄이 투하됐다.
호모 사피엔스의 살상능력은 갈수록 향상됐다. 더불어 희생자들이 흘리는 피의 양은 늘어갔다. 같은 종을 대량 살상시키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종은 오직 호모 사피엔스 뿐이다. 대부분의 육식동물은 같은 종을 먹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20세기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였다. 단어에 내재된 무구함에 반해 공산주의는 자체로 많은 피를 흘리며 영역을 확보했고, 냉전이라는 20세기 특유의 전쟁 방식을 생산했다. 미국과 구소련이 벌인 냉전은 침묵의 살인이었다. 피의 양은 열전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양 진영의 긴장감은 오히려 더 팽팽했다.
공산주의 이론은 철학자 칼 마르크스에 의해 처음 제시됐다. 그것을 바탕으로 혁명을 일으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나라는 러시아였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반 농업국가 러시아에서 먼저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까.
1917년 러시아에는 두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첫 번째 혁명은 오랜 봉건 왕정을 무너뜨렸다. 레닌에 의해 주도된 두 번째 혁명을 통해 탄생한 것이 소비에트(노동자, 농민에 의한 자치기구)다. 이후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1922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등장했다.
두 번째 혁명은 10월 혁명 혹은 볼셰비키 혁명이라 부른다. 10월 혁명과 강은 구체적인 연관성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10월 혁명은 깊은 가을 밤 네바강에서 울려 퍼진 한 발의 포성에서 비롯됐다. 대부분의 역사가 그렇듯 10월 혁명 역시 지극히 우연한 틈새에서 성공의 열쇠를 발견했다.
그 우연성은 72년 후 벌어진 베를린 장벽 붕괴 과정과 흡사했다. 1980년 대 말까지 독일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서는 자본주의, 동은 공산주의 체제였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와 판박이였다.
양국의 분단 배경 또한 2차 대전의 결과 때문이었다. 북한에 소련군, 남한에 미국이 주둔한 것처럼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미·영·프랑스에 의해 분할 점령됐던 서독은 동독보다 훨씬 큰 영토였다.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비슷한 규모로 양분됐다. 영토는 북쪽이 조금 더 컸으나 인구는 남쪽이 많았다. 독일의 경우 수도 베를린마저 동서로 나누어 놓았다. 동서 베를린을 구분하던 굳건한 장벽은 한반도 DMZ 철조망의 연장이었다.
장벽은 어처구니없는 일로 무너졌다. 1980년 대 소련의 장악력이 느슨해지면서 동독에선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동독 정부는 분출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 허가를 검토했다. 그러나 정부 대변인이 이를 ‘즉시 가능하다’고 잘못 발표하는 바람에 일이 커져버렸다.
기자회견장의 한 이탈리아 기자가 ‘베를린 장벽 철거’로 오역해서 타전하자 수많은 동독 사람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오래도록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서 베를린으로 가기를 원해왔다. 그들의 시도는 동독군의 무자비한 총알 앞에 번번이 좌절됐다.
한편 그 시각 베를린에선 영국의 록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의 노래 ‘히어로즈’는 장벽에 가로막힌 연인들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었다.
“총알이 우리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지. 우리는 키스를 했어. 마치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수치심을 벽 건너편에 그대로 둔 채…”
피의 일요일
그 날 동독 시민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서쪽으로 넘어갔다. 동독 군인들은 멍하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 역시 상황을 잘못 알고 있었다. 하루 전만해도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면 단 하나 뿐인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는 북한 주민들처럼.
일부 시민들은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28년 동안 굳건히 버텨온 장벽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동서를 가로질러 수많은 가족과 연인들을 분리시켜 온 내륙의 홍해가 갈라졌다. 그 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에서 공산 정권이 무너진 과정은 우연과 필연의 절묘한 연속이었다.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10월 혁명의 기운은 차르 지배하에 신음해온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 이스트를 머금은 밀가루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확 불씨를 던져 넣은 것은 네바강의 울려 퍼진 한 발의 포성이었다. 정작 대포에는 포탄이 없었다. 소리만 요란한 공포탄이었다. 마치 베를린 사태를 보도한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처럼. 우연치 않은 불씨 하나는 거대한 대지를 붉은 화염에 휩싸이게 됐다. 강변에 울려 퍼진 포성은 그 신호탄이었다.
10월 혁명은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후 공산주의는 20세기를 관통하면서 숱한 기대와 배신감을 세계 곳곳에 심어왔다. 그 결과의 하나로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된 채 두 개의 이념이 DMZ를 경계로 팽팽히 맞서 있다. 공산주의를 낳은 10월 혁명의 전후를 살펴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하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이다. 이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1세(1672-1725)는 러시아를 서유럽으로 바꾸려했다. 내륙의 중심이 아닌 서구로 통하는 발트해 연안에 신도시를 건설한 이유다.
페테르부르크는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다. 성 베드로는 신성(神聖)을 상징한다. 공산치하에선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표트르는 발트해 연안에 로마제국을 재현하길 원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첫 러시아 황제(차르)로 등극한 인물이다. 차르는 카이사르, 즉 로마의 황제를 의미한다.
표트르는 습기를 잔뜩 머금은 대지 위에 자신의 도시를 세웠다. 그 땅에 여름과 겨울 궁전, 아름다운 러시아 정교 성당, 군사요새를 건축했다. ‘베드로의 도시’는 성당의 종을 녹여 대포를 만들었다. 표트르가 강력한 군사대국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파벳을 개조해 러시아의 고유 문자로 삼았다.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는 그저 주어진 게 아니었다. 표트르 이전 17세기 러시아는 한낱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다.
포트르는 러시아를 개조했다. 강대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그러나 가정적으론 불행한 아버지였다. 그는 조선의 영조 같은 인물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에게 사형 언도를 내렸다. 아들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에서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버림받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몰래 평양을 다녀온 일이었다. 당시 평양 인근에는 북방을 담당하기 위해 상당한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역모라는 오해를 불러 올만 했다.
황태자 알렉세이 역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포트르가 왕비 대신 하녀와 정을 통하자 더욱 아버지를 멀리했다. 역모에 대한 소문이 나돌자 황태자는 한 때 외국으로 피신을 했다. 표트르는 황태자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귀국하게 만든 다음 처형시켰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 말의 현실 판이었다.
페테르부르크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조성한 표트르의 토목 대작이었다.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그곳에서 찬란한 영화를 누렸지만 비극적 종말을 맞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 하구에 건설된 신도시였다. 이후 2백 여 년 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 역할을 했다. 1904년 일본과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대함대가 발진한 곳도 페테르부르크였다. 대다수가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지만 영국의 방해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극동까지 이동한 러시아 발트함대는 일본 해군에 의해 한반도 근해에 수장됐다.
당시 러시아를 이끌던 니콜라이 2세는 무능했다. 1896년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던 조선의 민영환은 그를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인물”이라는 평했다. 그런 대외적 이미지와 달리 니콜라이 2세는 정치력을 갖추지 못한 군주였다. 심지어 대관식에서조차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는 소심한 고백을 해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내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그의 아내 즉 황후는 떠돌이 수도자 라스푸틴에게 국정을 맡겨 러시아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런 연유로 외국 언론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한 최서원(최순실)을 ‘한국의 라스푸틴’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 년 반가량 벌어진 러일전쟁은 충격적 결과를 낳았다. 유럽의 강대국 러시아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에 패했다. 유럽의 나라가 다른 지역 국가와의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일본은 자신들의 전력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진 않았다. 영국의 도움과 방해(러시아 입장에서)를 통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가장 두려워하던 국가였다.
영국은 러일전쟁 발발 2년 전인 1902년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영국은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했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오는 동안에도 연료나 식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도록 조치했다.
한편 미국의 금융전문가 쑹홍빙은 저서 ‘화폐전쟁’에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유대인을 탄압해온 러시아에 대한 유대인 자본가들의 애국심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유대인 자본가들이 일본에 전비를 제공하도록 도와주었다는 얘기다. 당초 일본은 전비를 마련하는 데 실패했으나 유대인 자본가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됐다. 모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개전 초 일본은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해 전과를 올렸다. 일본은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해 러시아 발트 함대를 와해시켰다. 그와 함께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는 오욕을 겪게 된다.
러일전쟁의 패전은 러시아 내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러시아는 막대한 전비와 희생을 치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항상 고난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집중된다. 과실에 익숙한 황실과 귀족들은 교묘하게 자신들이 져야할 짐의 무게를 줄였다.
자연 황실과 지배 계층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러시아는 농업 국가였다. 뼈 빠지게 농토를 경작한 농민들은 굶주렸으나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향락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임금에 신음해온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 역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도 황실은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1905년 1월 22일은 일요일이었다. 삶에 찌던 많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이 급료 인상을 요구하며 겨울 궁전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마침 휴가 중이었다. 군중들을 막아선 것은 차르의 근위대였다.
군중들을 저지할 수 없게 되자 얼마 후 그들을 향해 총이 발사되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듯 기마경찰들이 나타나 군중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겁에 질린 군중들은 일시 물러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혁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모스크바, 사라토프 등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66개 도시 44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시위 참가자들의 규모는 구르는 눈덩이처럼 시나브로 커져갔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사건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피의 일요일’ 이후 차르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황제의 권위는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추락했다. 결국 두마라는 의회를 설치해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두마 역시 1917년 2월 혁명에 의해 임시정부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