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혁명
1차 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은 차르와 러시아 국민들에게 재앙이었다. 막대한 전쟁 자금과 국민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초반 독일과의 전쟁에서 밀리면서 차르는 궁지에 몰렸다.
차르 정부는 군비를 감당하기 위해 화폐를 남발했다. 전쟁기간 동안 물가는 4배나 폭등했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의 피해자는 역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당시까지 러시아의 산업기반은 농업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요구했으나 귀족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농민들은 1861년 농노신분에서 벗어났지만 인구 1.5%에 불과한 귀족들은 여전히 전체 농지의 ¼을 소유하고 있었다.
도시노동자들의 삶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1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꼬리 임금에 일터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노동자, 농민들의 소득은 제자리걸음한 반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사회 내부의 불만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권력 기관의 중심부도 흔들거렸다. 1916년엔 러시아 군부 내 쿠데타 논의가 있었다.
연말에는 귀족들에 의해 차르의 ‘문고리 실세’ 라스푸틴이 살해됐다. 라스푸틴은 글을 읽지 못했다. 당연히 정식 신학 수업을 받지 않았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예루살렘을 다녀온 다음 갑자기 수도자 행세를 했다. 그곳에서 영적 스승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우연히 황태자의 병을 치료해 준 후 니콜라이 2세와 황후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를 멀리하라고 차르에게 직언한 많은 충신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황후는 “라스푸틴이 하는 모든 일은 성스럽다”며 그를 옹호했다.
결국 1916년 연말 라스푸틴은 황족들에 의해 살해됐다. 그를 죽이기 위해 음식물에 청산가리를 섞었다. 그것을 먹고도 죽지 않자 총으로 쏜 다음 네바 강물에 던졌다. 라스푸틴의 최종 사인은 익사로 되어 있다.
1차 대전의 수렁은 점점 더 러시아의 발목을 잡았다. 1914년 동부전선(러시아 입장에선 서부) 한 전투에선 러시아군 9만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와의 전쟁에 집중 투입됐던 독일군은 점차 러시아 쪽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슐리펜 계획은 개전 초 프랑스를 먼저 부순 다음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독일 총사령관의 작전 개념을 말한다. 넓은 국토를 보유한 러시아는 군인 동원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계산을 염두에 두었다.
독일이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감단할 수 없을 것이라는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다. 러시아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개전 2년 여 동안 러시아의 전사자, 포로, 실종자 수는 500만 명에 이르렀다.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지 못해 군인은 굶주렸고, 그들을 지원하는 국민들은 지쳐갔다. 전선을 이탈하는 군인들의 수가 늘어났다. 식량부족과 물가상승으로 경제는 엉망진창이었다.
모스크바의 가게 진열대에선 고기, 빵, 설탕, 식료품들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했다. 매춘과 각종 범죄가 넘쳐났다. 국민들의 인내심은 점점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그는 점점 더 요승 라스푸틴에게 의지했다. 어둠의 실세 라스푸틴이 황후와 공주들에게까지 추악한 손길을 뻗었다는 소문이 궁중 안팎을 떠돌았다.
러시아 의회인 두마는 1916년 연말 차르에게 “이대로 가다간 끔찍한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는 경고를 보냈다.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의 간곡한 외침을 애써 무시했다. 그에게는 무 대응이 최선의 대응이었다. 원래부터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한 인물이었다.
민심은 무능한 차르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1917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시위 슬로건은 절규에 가까웠다. 자유나 권리 같은 추상적 단어가 아니었다.
“빵을 달라.”
예나 지금이나 배고픔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없다. 빵으로 시작된 외침은 네바 강의 다리를 건너 페테르부르크 도시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왕정타도”로 변해갔다. 혁명의 슬로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해지는 법이다. 더불어 시위의 양상도 거칠어졌다.
2월 25일 파업이 러시아 전 도시로 확산되었다.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엔 노동자들 뿐 아니었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때처럼 러시아 화이트칼라들이 대거 동참했다. 학생과 교사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도시 분위기는 불씨를 지닌 채 화약고 곁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시위는 점차 폭동으로 바뀌어갔다. ‘소비에트 만세’라는 구호가 이 무렵 처음 등장했다.
차르는 군대에 시위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전처럼 차르의 명에 잘 따르지 않았다. 탈영을 하거나 잠적하는 수가 늘어났다. 지하에서 숨 죽여 지내던 사회주의 정당들은 잽싸게 소비에트를 설립했다.
이 과정은 중국이나 쿠바 등 맨 손으로 권력을 쟁취한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공식처럼 됐다. 초기에는 지하의 몇몇 소수로 시작한 후 선전 선동으로 세를 불리다가 마침내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는 방식이다. 수도 페테르부르크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 갔다.
두마는 차르에게 퇴위를 건의했다. 차르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조에게 물려받은 로마노프 왕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차르는 동생에게 양위를 권했다. 눈치 빠른 동생은 이를 거절했다. 지는 해를 억지로 붙들어 놓을 수는 없다.
2월 27일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결성됐다. 당시에는 과격한 볼셰비키(다수파라는 의미)에 비해 온건한 멘셰비키(소수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만 해도 다수 민중들은 급진적 볼셰비키의 주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조를 하지 않았다.
3월 2일 두마와 소비에트가 힘을 합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틀 후 니콜라이 2세가 퇴위를 발표했다. 이로써 1613년부터 이어져온 차르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미하엘 1세에서 시작해 18대 304년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이었다.
더불어 황실과 귀족, 자본가, 군인 등 기득권 세력들의 전횡은 끝났다. 그러나 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관차는 폭발직전의 기운을 가득 실은 채 그해 10월의 어느 날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종착역은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러시아 혁명이었다.
네바강의 포성
10월 혁명을 이끈 사람은 레닌이었지만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사람은 철학자 칼 마르크스였다.
‘자본론’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가운데 하나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자유경제시장 원리를 뒷받침 해온 바이블이라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공산주의의 경전이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가 지닌 부는 상품의 막대한 축척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알쏭달쏭한 말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될 것 같지만 부(富)는 일부에게 한정되어 가고, 생산에 가담한 노동자는 자본에 착취당하는 노예로 전락한다는 경고다.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애덤 스미스의 낙관에 대한 예리한 반론이다. 반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그들의 욕망 덕분이다.”
이윤과 욕망이라는 단어가 부, 막대한 축척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자본론의 단어와 충돌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각각의 작은 욕망들이 모여 전체의 번영을 이루게 된다.
그 욕망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조절되고 그에 따라 사회는 점점 발전하게 된다. 그러니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시장에 맡겨 두어야 한다는 게 ‘국부론’의 요체다.
반면 마르크스는 욕망과 시장에 의존하는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붕괴를 막기 위해선 국가라는 거대 조직의 통제와 기능이 작용해야 한다. 그는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분배함으로써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의 구분이 사라지는 사회를 희망했다.
‘공산(共産)’과 ‘공유(共有)’에 대한 원형은 초기 기독교 집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의 제자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며 -2장 45절”라고 당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기록해두었다.
공산과 공유 개념은 특정 종교의 소규모 집단을 중심으로 간간이 시도되어 왔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이를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공산주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40년 프랑스였다.
혁명의 열기와 반동을 경험한 지식인들 사이에 ‘공동 소유’ 개념이 형성되었다. 철학자 피에르 르루는 “부르주아의 임무는 하층민을 착취한 일”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소중한 개개인의 존엄성을 깨트리는 것이 사유(私有)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지적했다. 이 무렵 블랑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 수립을 주장했다.
그런 주장들에 맞춤 이론을 제공해준 사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이 둘은 1848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을 출간했다. 이듬 해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날 때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결국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은 자본주의가 가장 앞선 영국 등 서유럽이 아닌 낙후된 러시아였다.
러시아에는 1917년 2월과 10월 두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10월 혁명은 볼셰비키혁명이라고도 부른다.
러시아 민중들은 오래도록 차르 체제 하에서 탄압을 받아왔다. 1861년 간신히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토지를 구매할 돈이 없었던 탓에 여전히 가난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도 다를 바 없었다. 1900년 대 초 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 한 채에는 평균 16명의 노동자들이 기거했다. 6명이 한 방을 나누어 써야 할 정도였다. 1차 대전이 벌어지자 삶의 조건은 더욱 악화됐다.
많은 노동자들이 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면 공장에서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1916년이 가까워질 무렵 식량 부족과 물가 상승으로 러시아 민중들의 불만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2월 혁명으로 차르는 퇴진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노동자 대표라는 ‘이중 권력’은 위기에 원활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물가는 계속 치솟고, 식량 구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 논 1차 대전의 수렁 역시 자꾸만 깊어졌다. 러시아는 동서 두 개 전선을 형성한 독일을 제대로 상대해내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1917년 4월 독일에서 망명하던 레닌이 돌아왔다. 독일은 레닌의 귀국이 러시아의 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이끄는 볼셰비키가 집권을 하면 결국 러시아는 전쟁에서 발을 뺄 것으로 판단했다.
독일은 레닌 일행이 기차로 자신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다. 열차 안에는 레닌의 아내도 타고 있었다. 실제 레닌은 나중에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고 1차 대전에서 발을 뺐다. 물론 독일에 대한 우호적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새로 건국된 소비에트 국가가 강대국 독일에 의해 무너질 것을 염려한 탓이다. 하지만 이 결정은 영국과 프랑스를 등 돌리게 만들었고, 내부의 적인 멘셰비키들을 자극해 내전으로 이끌게 됐다.
혁명가 레닌의 귀국으로 러시아 정국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를 중심으로 급격히 세력이 결집됐다. 하지만 6월 18일 노동자, 군인들에 의한 반란 실패로 레닌은 다시 핀란드로 피신해야 했다.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않은 채 너무 성급하게 행동에 나섰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레닌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그 증거로 볼셰비키 당원 수는 6개월 사이 10배나 늘어났다.
레닌은 핀란드에서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10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 온 레닌은 몇 개월 사이 도시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것에 놀랐다. 몇 달 전에는 혁명에 실패했지만 이번엔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10월 들어 농민들의 봉기가 잦아졌다. 동부전선(러시아 입장에서 서부) 군인들과 발트 해 해군들은 임시정부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1차 대전을 치르기 위해 건장한 남성의 50%를 전선으로 내보냈다.
후방에 남은 그들의 아내들은 강력한 불만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과부들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기꺼이 혁명에 몸을 던졌다.
소비에트 연방은 군인과 민중들에게 봉기를 부추겼다. 10월 24일 불리함을 느낀 임시정부는 혁명을 막기 위해 도시를 봉쇄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일반 시민은 물론 군인들까지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빈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무너질 정도로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그날 아침 9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조치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시 임시정부에 의해 빼앗긴 인쇄소를 되찾았다.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온 신문을 발행하던 곳이었다. 오후 3시 페트로그라드 주요 다리를 점령했고, 5시 통신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마침내 볼셰비키는 10월 25일 봉기를 일으켰다. 5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볼셰비키 함대가 페테르부르크 항구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북위 59도57에 위치한 항구에는 일찍부터 어둠이 내렸다.
네바강변에 자리한 겨울궁전은 포병생도와 여군, 용맹한 코사크 민병대 등 3천 여 명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과 교전을 벌이면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게 뻔했다. 볼셰비키 함대에는 겨울궁전을 공격할 변변한 대포조차 없었다. 다만 상대는 까맣게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후 6시 15분 포병생도들이 먼저 겨울궁전을 떠나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무리들이었다. 건물 안에선 임시 정부 내각이 사태에 따른 조치를 논의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그들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반란에 가담한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만약 궁전에 코사크 민병대가 남아 있다면 막대한 피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밤 9시 45분, 겨울궁전 주변은 캄캄했다. 순간 네바 강에 정박 중이던 순양함 오로라에서 포성이 터져 나왔다. 제정 러시아와 영욕을 함께 해온 강이었다. 겨울궁전에 남아 있던 여군과 일부 생도들은 포성과 함께 섬광을 목도할 수 있었다. 하늘과 강 두 곳에서 강력한 빛이 쏟아졌다. 실제로는 대포알이 빠진 공포탄에 불과했다.
새벽 2시 볼셰비키 무리들이 겨울궁전으로 쳐들어가자 일부 생도와 여군들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코사크 민병대들은 이미 궁전을 빠져 나간 후였다. 코사크 민병대는 1차 대전을 통해 ‘전투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군대였다.
이들은 원래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독립 약속을 받고 폴란드와의 전투에 참가했으나 나중에 배신을 당했다. 러시아 혁명 후 내전이 벌어지자 백군 편에 섰다가 결국 강제 해산 당했다.
임시정부 내각은 순순히 항복을 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즉시 의회 개회식을 가졌다. 이로써 10월 혁명은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