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MK 1형이라 불리는 전차였다. 실전에 전차가 투입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강철로 만든 전차를 본 독일군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전차는 이내 고장 나 커다란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다.
전차는 23년 후 벌어진 2차 대전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는 ‘게임체인저’로 등장했다. 1차 대전서 전차에 기급한 독일은 전차부대의 기동력을 살려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를 유린했다. 전차의 위력은 한국전쟁에서도 입증됐다.
하지만 2022년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러시아 전차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차의 시대는 100여년 만에 수명을 다한 느낌이다.
솜 전투에 참전했던 독일군인 가운데는 나중에 2차 대전을 일으킨 뜻밖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려다 부적격 판정을 받은 후 독일군대에 들어갔다.
그는 이프르 전투와 솜 전투에서 연락병으로 활약했다. 영화 ‘1917’에 나오는 주인공이 맡은 역할이다. 당시만 해도 무전기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웠다. 성능도 뛰어나지 않아 연락병들이 목숨 걸고 뛰어다니며 전장을 누벼야 했다.
그만큼 위험한 병과였는데 1914년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은 독일군 병사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연락병이 히틀러다. 그가 엄혹한 전쟁에서 생존한 대가로 인류는 또 한 번 대전쟁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
뫼즈강을 품은 베르뎅은 전략 요충지다. 1,2차 대전은 물론 1870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마지막까지 버티다 함락된 곳이 바로 베르뎅이다. 프랑스로선 반드시 갚아야할 빚이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통일을 이룩했고, 유럽의 새 강자로 떠올랐다. 보불전쟁은 중요한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참전을 위해 떠나자 이탈리아는 재빨리 로마를 접수했다. 이때의 로마는 교황청을 의미했다. 2천 년 가까이 지속돼온 교황청 권력이 무너졌다.
1870년 이후 1929년까지 60년 가까이 교황청은 세속적 영토 없이 유지됐다. 1929년 이탈리아와 교황청은 라테라노 조약을 맺고 바티칸 시국을 탄생시켰다. 면적 0.44㎢의 가장 작은 국가다. 하지만 영향력은 여느 큰 나라 못지않다.
어리석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는 죽기 살기로 싸웠다. 독일은 프랑스를 말려 죽이려 했고, 프랑스는 한 명의 군사가 남을 때까지 베르뎅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나중에 독일은 1차 대전의 빚을 갚겠다며 1940년 다시 이곳으로 진격했다. 2차 대전이라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베르뎅 전투’를 쓴 작가 엘리스터 혼은 현장을 둘러 본 후 “그 낭비와 더 없는 어리석음에 소름이 끼쳤다”고 소감을 적었다. 1차 대전 연구에 공헌한 역사학자 앙투안 프로스트는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베르뎅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독일은 12월에야 베르뎅에서 물러났다. 독일 황제는 팔켄하인 사령관을 해임시켰다. 그러나 전황은 이미 독일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결정타를 가한 것은 중립을 지키던 미국의 참전이었다.
양측의 지루한 힘의 균형은 미국의 참전으로 단숨에 무너졌다. 미국은 연합군과 동맹국 사이에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먼로주의(미국과 유럽의 상호 불간섭 원칙) 이래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고립을 원하고 있었다.
복잡한 유럽 문제에 되도록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유럽으로부터의 간섭도 사양했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 제국들끼리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 과정은 한 편의 첩보 영화 같았다.
독일의 외무장관 치머만은 1917년 1월 멕시코 주재 대사관으로 암호로 된 은밀한 전보 하나를 보냈다. 그 안에는 세계를 뒤흔들 내용이 담겨 있었다. 멕시코는 과거 미국과의 전쟁에서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라는 큰 땅을 빼앗겼다.
그 땅을 되찾고 싶었으나 힘이 부족했다. 독일은 이런 멕시코의 가려운 곳을 찔러 들어갔다. 만약 미국이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면 즉시 미국을 침략하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멕시코가 빼앗긴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
멕시코로선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암호로 쓰인 이 전보의 내용이 영국 정보 당국에 의해 해독되고 말았다.
미국은 발끈했다. 가뜩이나 영국을 해상 봉쇄한다는 명분하에 펼친 독일의 잠수함(U보트) 작전으로 인해 미국 내 독일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특히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루시타니아호에 탑승한 100여 명의 미국인 사망 사건으로 여론은 악화일로였다.
영국을 봉쇄해야하는 독일은 잠수함 작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미국의 참전은 사실상 시간 문제였다. 미국의 참전을 상수로 놓았을 때 그들의 배후를 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두어야 했다.
미국이 멕시코에 발목 잡혀 유럽의 전쟁에 뛰어 들 수 없게 만들자. 멕시코에 적당한 구실을 주어 대리전쟁을 하게 하면 손 안대고 코풀기다.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에게 보낸 비밀 전보문에 담긴 독일의 속내였다.
당시만 해도 암호해독기가 나오기 전이었다. 암호로 된 내용을 알 길 없었다. 하지만 독일이 미처 모르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영국 정보국은 이미 독일 암호 책을 갖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5년 러시아 해군은 독일 순양함 하나를 나포했다. 그 직전 독일군 함장은 암호 책에 납을 달아 바다 속에 던졌다. 그는 암호 책이 영원히 수장된 것으로 믿었다. 러시아 잠수부에 의해 바다 속에서 건져낸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러시아는 암호 책을 동맹국인 영국에 넘겨주었다.
2년 사이 독일의 암호 체제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내용을 해독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영국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 앞에서 직접 독일이 보낸 전보의 내용을 해독하는 치밀함까지 연출했다.
전보의 내용은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마침내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8일 뒤 멕시코는 독일 외무장관 치머만의 제안을 점잖게 거절했다.
독일은 잔머리 굴리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정체 상태에 놓였던 전쟁의 양상은 180도 바뀌었다. 이듬해 11월 11일 4년여를 끌어 온 1차 대전은 독일의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그 동안 4천 여 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