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영국
팔켄하인은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 했다. 베르뎅에서 승리하면 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좀처럼 현실로 연결되지 않았다.
전투의 초반은 성공적이었다. 전투개시 4일 만에 프랑스의 방어선이 무너지며 두오몽 요새를 손에 넣었다. 팔켄하인은 참모들과 프랑스제 샴페인을 터트렸다. 그러나 독일군은 두오몽 요새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뫼즈 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포격을 퍼부은 후 공격과 후퇴를 되풀이했다. 플뢰리 지역은 두 달 사이 16번이나 국기가 바뀌었다. 하루는 독일, 다음 날은 프랑스 국기가 플뢰리 하늘에서 펄럭거렸다.
이후 베르뎅 전투는 느리고 끔찍한 살육전으로 변모했다. 양국의 젊은이는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결국 가장 어리석은 전쟁의 표본으로 남게 됐다. 죽고 죽였지만 어느 쪽도 승자는 없었다.
독일군의 포병 화력은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인근 솜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다시 평형을 이루었다. 영국군까지 가세한 솜 전투에 독일군은 포병을 포함한 병력의 일부를 보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사상자는 늘어났다. 독일군 총사령관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프랑스군이 오래 버티진 못할 것으로 믿었다”며 자신의 오판을 시인했다.
독일은 개전 초기 승세를 잡기위해 ‘무자비한 압박’ 전술을 펼쳤다. 나폴레옹의 전술 그대로 ‘닥공’만이 살길이라 판단했다. 이를 위해 끌어 모을 수 있는 포병과 대포를 최대한 동원했다. 프랑스군 진영에 밤새 무지막지한 포탄을 쏟아 부었다.
프랑스의 초반 열세에는 정보국의 오판도 한 몫을 했다. 정보국은 1916년 새해 독일이 베르뎅을 목표로 삼을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으나 무시했다. 7군단을 강의 서안으로 보내 최소한의 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다.
프랑스군은 진지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뫼즈 강 서쪽으로 독일군이 넘어오는 것만은 막아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고수하려 들었다. 프랑스도 베르뎅의 중요성을 익히 알았다.
두오몽 요새의 함락 소식을 들은 후 베르뎅 인근 사단 수를 20½로 늘렸다. 그러자 독일군은 수적 열세에 빠졌다. 포병의 앞선 화력으로 간신히 버텨나갔다. 당시 프랑스군의 주포는 75㎜였으나 독일군은 훨씬 큰 중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5월에 155㎜ 포 2개 군단을 보내 열세를 만회코자 했다.
독일군의 기세, 프랑스군의 끈기가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다. 그 균형의 경계에서 희생자의 수만 늘어났다. 양측 참호의 중간 지점은 전사자와 온갖 버려진 것들로 가득했다. 화약 냄새를 잔뜩 머금은 대지는 생명을 잃어갔다. 종래는 죽음의 땅(No Man`s Land)으로 변해갔다.
독일군은 백 년 전 자신들을 괴롭힌 적장 나폴레옹의 전술을 숭배했다. 적의 약한 고리를 골라 병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이었다. 전선의 일점을 돌파하면 적은 단숨에 무너진다.
적의 전술을 배웠으나 정작 간과한 것은 20여 년 전까지 자신들의 수상이었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당부였다.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러시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동과 서 두 개의 전선을 한꺼번에 펼치면 독일은 감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비스마르크는 죽고 없었다. 그의 경고대로 두 개의 전선 함정에 빠진 독일은 진퇴양난에 허우적댔다. 지루하고 파멸적인 전쟁을 끝낼 희망은 바다 건너에서 싹트고 있었다.
1984년 어느 날 두오몽 공동묘지에 당시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전쟁 발발 70년만이었다. 1,2차 대전 전사자들을 합동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왜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을까. 실제 콜의 아버지는 베르뎅 전투 참전용사였다. 미테랑은 2차 대전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적 있었다. 비를 맞으며 그들은 어떤 생각에 빠졌을까.
전선은 교착상태로 접어들었다. 연합군과 동맹군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전공(戰功)에 목마른 장군들은 조바심을 냈고, 포탄과 총알은 무의미한 희생자 수를 늘려갔다. 죽음의 땅은 점차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규모 솜 공세는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영불 연합군은 상당한 기동력을 발휘해 독일군 사령부를 놀라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독일군 사령관은 베르뎅의 4개 사단을 급히 솜으로 파견해야만 했다. 솜이 무너지면 베르뎅도 도미노처럼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에서 슐리펜에 이르기까지 독일 전략가들의 고심은 한결 같았다. 전력의 분산을 최대한 피해라.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해서 먼저 부순 다음 다른 곳을 도모하라. 바로 적이었던 나폴레옹에게 호되게 당한 후 배운 전술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의 구상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베르뎅에 발목이 잡혀 있던 독일군은 인근 솜에서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 솜 전투는 여러모로 베르뎅 전투와 닮은꼴이었다. 강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모두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솜과 베르뎅 전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영국군은 처음으로 대규모 육군 공격을 계획했다. 영국 육군은 무려 60개 사단을 솜 강 전투에 투입시켰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은 10개 사단 가량이었다. 독일의 명백한 수적 열세였다.
하지만 1916년 7월 1일 전투 개시 첫 날 영국 육군 사상 최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2만 여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5만 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군은 육상에선 독일군에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
4개월 여 1차 솜 전투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 51만 5000명, 독일군 65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솜 강의 강물은 피로 물들여졌다. 2차 솜 전투 역시 양 측 합쳐 5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남겼다.
영국군은 7월 15일 다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이후 두 달간 무려 90차례나 일본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다. 하루 한 차례 이상의 파상 공격을 펼쳤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영국군은 고작 1㎞를 전진했다. 그 대가로 8만 여 명의 대영제국 젊은이를 잃어야 했다. 귀족과 명문가의 자재도 많이 포함됐다. 영국의 명문 이튼 고교 한 학교 졸업생만 2000여 명이 1,2차 대전에서 희생됐다.
막대한 병력 손실을 본 영국은 9월 15일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