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전투
독일이 주목한 곳은 뫼즈 강변에 위치한 작은 도시 베르뎅이었다. 독일은 베르뎅을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을 전략 거점으로 점찍었다.
독일군 총사령관 팔켄하인은 ‘아군의 공격을 한 곳에 집중시켜 적을 흩트려 놓기’를 원했다. 바로 그들을 괴롭혔던 프랑스 나폴레옹의 전술이었다. 적의 전략으로 적을 꺾겠다는 게 팔켄하인의 속셈이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그는 베르뎅을 치면 단숨에 프랑스의 수비라인을 무너뜨리고 파리를 향해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베르뎅은 전략요충지다. 1차 대전 최악의 전투는 물론 연합군과 독일이 2차 대전서 최후의 격전을 벌인 벌지 전투 역시 베르뎅 인근 뫼즈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뫼즈 강은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를 지나는 총 길이 925㎞의 긴 강이다. 참고로 한강의 길이는 494㎞다. 이 작은 도시는 베르뎅 조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조약이다. 로마이후 최대제국을 이룬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740-814년)는 아들들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하나 밖에 살아남지 않아 제국은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갔다. 새 황제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장자 상속을 바랐다. 하지만 교통정리를 제대로 못한 채 죽었다. 이후 세 아들 사이 내전이 벌어졌다.
3년 간 전쟁을 치른 후 세 아들이 모여 조약을 맺은 곳이 바로 베르뎅이었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경계가 생겨났다.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오늘 날 유럽의 국경의 원형이 있게 만든 조약이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로마 가톨릭 교황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퇴조했고,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조약에 의해 스위스, 네덜란드 등 작은 나라들이 처음으로 독립의 꿈을 이루었다.
1916년 2월 21일 베르뎅에서 전투가 개시됐다. 독일은 금세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지긋지긋한 전투가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18일까지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독일의 공격은 시작부터 불길한 조짐을 드러냈다. 때마침 덮친 악천후로 인해 공격이 지연됐다. 2월 21일 새벽 마침내 독일군의 대 공세가 시작됐다. 상대의 허를 찌르기 좋은 시각이었다.
독일군 사령관 팔켄하인은 전투 개시 12시간 안에 프랑스 군 진영에 무려 120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붙도록 명령했다. 단숨에 대세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였다.
독일군 보병들에겐 개인총기는 물론 수류탄, 화염방사기 등 프랑스군을 괴롭힐 온갖 무기들이 주어졌다. 독일군은 질서 정연했고, 조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결연한 의지로 무장했다.
척후병들은 포병의 사격을 돕기 위해 프랑스군 진지를 엄밀히 관찰했다. 포병의 포격 명중률이 높을수록 전쟁을 일찍 끝낼 가능성은 커진다. 그만큼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확률은 높아진다.
그들의 1차 목표는 베르뎅 일대 관측이 용이한 두오몽 요새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팔켄하겐은 참모들에게 그곳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팔켄하인은 보병과 포병의 효율적인 협력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포병이 프랑스군 진영을 흔들어 놓을 순 있지만 결국 요새 점령을 완수하는 쪽은 보병이었다. 포병 장교들에겐 간혹 그 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포병의 1차 공격은 사령관을 만족시켰다. 프랑스군은 새벽까지 이어진 포탄 세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보병들이 요새를 향해 정신없이 밀고 올라갔다.
프랑스군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길게 이어진 참호와 부채꼴 모양의 철조망에 의지해 죽을 각오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 전력은 바로 전해 11월까지 이어진 2차 샴페인 전투에 병력과 화력의 일부를 지원한 상태여서 헐거워져 있었다. 그러나 두오몽 요새의 중요성을 감안해 세 겹을 두른 참호 건설을 끝낸 후여서 방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패탱은 “후퇴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마라”는 엄명을 일선 장교들에게 내려두었다. 마지막 남은 병사 하나가 죽을 때까지 요새를 사수하자는 결사항전 결의였다. 그는 두오몽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두오몽은 베르뎅 인근에서 가장 큰 요새였다. 지키려는 의지는 충만했지만 문제는 요새에 배치된 프랑스군 포병의 화력이었다. 대치하고 있는 독일군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졌다.
베르뎅에 주둔한 프랑스 연대의 드랑 대령은 사령부가 샴페인 전투에 병력을 보낸 것에 대해 노골적 불만을 나타냈다.
이런 적군의 분위기를 독일군 사령관이 놓칠 리 없었다. 팔켄하인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 “폐하, 프랑스군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력을 다하겠지만 결국 피 흘리며 쓰러질 것입니다”고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팔켄하겐의 보고서는 반만 옳았다. 그들이 엄청난 프랑스 군사들을 죽인 건 맞지만 독일군 역시 많이 희생됐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서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전쟁은 어느덧 장기전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수비는 견고했다. 독일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독일은 프랑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어야 했다.
군사학자들은 결과적으로 팔켄하겐의 우유부단함이 장기전에 한 몫을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베르뎅 전투에 앞서 팔켄하겐은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에 평화협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팔켄하겐은 정면 돌파를 강요받았다. 독일군 사령관은 다시 한 번 전력을 기울여 프랑스군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기로 했다. 그가 판단한 프랑스군의 급소가 바로 베르뎅이었다.
두오몽 요새를 처음 수중에 넣었을 때만 해도 그의 전략은 적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군은 확실히 독일군의 초반 포격에 겁을 먹었다. 독일의 놀라운 공업생산력은 1915년부터 일 년 여 동안 대포의 생산량을 두 배나 늘렸다.
프랑스는 일시 위기에 처했으나 독일 측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동부전선의 승리는 보잘 것 없었고, 영국의 참전으로 서부전선의 전장은 확산됐다. 독일군 정보국은 손쉬운 승리를 장담했지만 실제 전황은 그렇지 못했다.
상대의 손실만큼 아군의 희생도 늘어났다. 2월부터 6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는 1:1.1에 불과했다. 이는 독일의 당초 예상보다 월등 밑도는 수치였다.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기는커녕 독일이 먼저 백기를 들 지경이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솜 전투에서 밀리고 있던 독일군을 위해 4개 사단을 지원해야 했다. 독일군 사령관은 전황이 점점 꼬이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럴수록 더욱 바짝 고삐를 졸라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