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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나 Jan 20. 2023

타투 할 때 서로 손잡아 주는 친구들이랑 꿈꾸는 미래

결혼 안 하면 나중에 외롭다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너 낳을 때도 너 동생 낳을 때도, 너네 아빠는 늦게 왔다? 일하느라 어쩔 수 없었겠지. 근데 전화는 계속 안 받지, 배 아프고 정신없는데 혼자 배 붙잡고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데, 가는 길에 방에 이부자리 펴놓은 거 돌아보면서, 가서 못 돌아오면 어떡하지? 아기랑 같이 돌아올 수 있겠지? 이런 생각 하면서 갔어"


엄마가 내 출산일을 회고하며 종종 하시는 말씀이다. 당연하게도 엄마의 출산일에 아빠가 의도적으로 늦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날의 사정을 아빠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지금처럼 모두가 주머니마다 손목마다 스마트 기기를 품고 다니던 시기가 아니었으니 연락이 늦었을 수도 있고, 연락을 받았지만 일이 너무 바쁘셨을 수도 있고, 차가 많이 막혔을 수도 있다.


아빠는, 그 나이대 아저씨들이 그렇듯 살짝 가부장적이지만, 그 나이대 아저씨들에 비해 훨씬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다. 어릴 때 아빠에게 자주 듣던 말은 '엄마 깨우지 마. 아빠가 할게', 아빠에 대한 오랜 기억은 숟가락을 들고 슈우웅 하며 어떻게든 어린 내게 밥을 먹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다.


아빠가 가정적이고 말고를 떠나서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는 시대적으로 지금보다 차별이 심했고, 그 차별이 엄마의 삶을 여러모로 힘들게 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늦는 와중에도, '여자가 그런 일로 남편에게 서운함을 표하면 안 된다'라는 말이나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해야 아들을 낳는 거야'와 같은 말을 들으며,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러 가셨다. (당시 여아낙태가 만연하여 의사가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으나, 엄마는 느낌만으로 내가 딸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분만을 시도했지만 결국 제왕절개를 해야 해서 추운 무균실에서 알몸으로 기다리느라 너무 춥고 당황스럽고 조금은 서럽기까지 했다고.


그렇게 어렵게 낳은 첫째 딸인 나는 아들이 아니라서 아들과 다르게 길러졌지만, 가족들에게 많이 사랑받고 자랐다. 어렸을 때 아빠는 나를 보려고 점심시간에 집에 다녀갔을 정도라고 하니, 요즘 말로 하면 '딸바보'로 불리셨을 테다. 가족끼리 갈등과 어려움이 없던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많이 사랑받았으니 그만큼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정상가족이 되면 무조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남자가 무조건 싫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비혼'을 미래의 선택지 맨 위에 올려두고 있다. 그냥 혼자 사는 걸 꿈꾸는 것은 아니고, 비건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함께 서로를 돌보고 응원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꿈꾼다.


이를테면 아침에 식물에 물 줬냐고 서로 물어보면서 식물에 물도 함께 주고, 장을 같이 보거나 채소를 기르고, 서로가 먹고 싶은 반찬과 요리를 해서 나눠 먹고, 누가 요리하면 옆에서 남은 설거지를 미리 치워주고, 함께 밥 먹고나서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그릇을 싱크대에 옮기며 '내가 묻히고 네가 헹굴래? 아님 네가 묻히고 내가 헹굴까?' 이야기 나누며 도란도란 설거지한 후에 함께 쉬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리사이클링 크래프트 작업도 함께 하고, 누군가 꿈을 가지면 옆에서 부추겨주며,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라며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너무 무서운 꿈을 꾼 날이면 잠시 나란히 누워서 떠들 수 있고, 타투 할 때 서로 손을 잡아주는 그런 다정한 삶을 말이다. 누군가는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친구 집에 머물 때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머물 때 함께 경험한 일상들이다.


 경험을 공유했던 친구들 중에 숲과 샐러리라는 친구들이 있다. 작년에 나와 숲은 샐러리에게 타투를 받았다. 숲이 먼저 다리에 핸드포크(바늘로 한땀 한땀 찌르는 타투)로 받았고, 나는 팔에 머신(기계로 하는 타투)으로 받았다. 내가 타투를 받기 전, 숲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정말 아파서 기절할 뻔했다고 말했는데, 솔직히 나는 처음에 흔히 쓰이는 상투적 표현으로 '기절할 뻔'이라고 말한 줄 알았다. (타투를 받고 나서 그게 아님을 알았다) 내가 타투 받는 날이 다가오자, 숲은 나에게 '그날 같이 가서 손을 잡아주겠다'라고 했다. 세상에, 타투 하는데 옆에 손잡아 주는 친구까지 필요한 걸까? 생각했다. (타투를 받고 나서 손잡아 주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드라마에서 많이 봤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고 고백해 본다. 긴급하게 돌아가는 분만실에서 고통에 휩싸여 힘을 주는 임산부의 손을 잡아주는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드라마의 장르가 시트콤이나 아침 드라마라면 남편의 머리칼도 조금은 뜯기는 그런 씬 말이다. 물론 나는 임신한 것도 아니고, 숲과 나는 비건 페미니스트 동료이자 친구 사이이며, 타투와 임신의 고통을 비교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고 힘이 되어주기 위해 '손잡아 주러 오겠다'라고 이야기하는 숲의 다정함이 더욱 귀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타투를 한 달 반 사이의 텀을 두고 두 번에 나눠 받았는데, 처음 받은 날 마지막에 '이제 제발 그만 찌르라'라고 애원했기 때문임을 미리 밝힌다. 내가 첫 타투를 받는데 너무 큰 타투를 골랐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첫 색 타투는 작게 받으시고, 가능하면 선 타투를 먼저 받아보고 색을 채우는 타투를 받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받을 만했고, 샐러리도 (내 손을 잡아주러 와서 브이로그까지 찍은) 숲도 '어 뭐야? 잘 참네?'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을 넘어가자, 진짜 살을 안쪽까지 찢는 듯한, 심장까지 통점이 연결되어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플 때 숲의 손을 꼭 잡는 게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고, '혹시 내가 너무 세게 쥐어서 손이 아프면 말해'라고 할 정신이 있었는데, 점점 그런 정신도 없어졌다. (이때는 샐러리가 타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랬고, 이제는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다고 한다. 타투를 받을 분들은 참고하시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두고 타투이스트인 샐러리는 '움직이면 안 되는데'와 '미안해'와 '우와 색 예쁘게 들어간다, 잘 참는다'를 연발했고, 숲은 내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끝말잇기도 하자고 하고, "네가 최고의 도둑이라면 뭘 훔칠래?" 같은 웃긴 상황극도 이야기하고, 계속 이런 저런 말을 걸어주면서 내 정신이 멀리 떠나가지 않도록 애썼다. 너무 아파서 혼이 빠질 것 같은데, 옆에서 그렇게 계속 대화를 이끌어주니까 웃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견딜 수 있었다. 어제 두 번째 타투를 받았는데, 컨디션도 더 안 좋고 고통이 심해서 내가 말할 기운조차 없자 내 손을 꼭 쥔 숲은 자신의 과거 썰까지 차근차근 풀어가며 내 정신을 붙잡아뒀다. 두 시간 반 동안 친구의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유학시절, 대학 시절까지 줄줄이 회상하며 썰을 풀어주는 친구가 또 어디 있을까? 잠시 숲이 내게 줄 물을 뜨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 이불이나 베개나 내 머리칼을 꽉 쥐었는데, 고통을 완화하는 데에는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만한 것이 없구나, (물론 그 고통이 모두 완화되진 않지만) 손을 잡는 게 함께 힘을 내는 느낌을 주는구나 깨달았다.


다정한 친구에게 다정함을 잘 배운 나도 숲이 두 번째 타투를 받을 때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말을 걸어주며 응원했다. 숲이 너무 아파서 숨을 참고 인상을 쓸 때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고 애원하며 함께 흡-하 호흡도 하고,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 양손을 잡고 같이 몸에 힘을 주며 버티고, 바늘이 무릎을 지날 때 숲이 눈물을 흘리면 계속 말을 걸고 눈물을 닦아주고 물도 권해주면서 '어떻게 하면 이 친구의 고통을 덜 수 있지?' 고민했다. 숲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몸의 안과 밖에서 식은땀이 나는 듯했는데 리터럴리 '속상하다'라는 단어를 몸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입에 라디오가 달린 것마냥 별별 이야기로 계속 숲의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했는데, 끝나고 나니 너무 아무 말이나 한 것 같아서 머쓱해지기도.


타투 받은 후 샐러리가 촬영 중인 모습을 숲이 촬영해 줌


내 팔에 새긴 타투를 볼 때마다 나와 숲이 샐러리에게 타투를 받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아픔을 견딘 그 순간들이 계속 떠오를 것 같다. 잠깐 샐러리의 바늘이 쉴 때 온몸에 긴장이 풀려서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왜 MZ 세대는 돈 주고 고통을 사는 걸까?' 같은 대사를 던지며 실없이 웃던, 그런 순간들까지도. 내가 집에서 혼자 설거지를 할 때 함께 설거지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혼자 밥을 해먹거나 파를 다듬을 때 친구들과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출산할 때 못 올 수도 있는 남편과 타투 할 때 기꺼이 손잡아 주러 오는 친구
함께 밥 먹고 나서 '잘 먹었어'라며 일어나서 TV 보러 가는 남편과 함께 설거지하러 가는 친구
엄마가 밥 차릴 때 누가 시키지 않으면 수저 한 번 미리 놔본 적 없는 남편과 누군가 요리 시작하면 옆에서 얼쩡거리며 감자 껍질이라도 깎고 설거지라도 하는 친구


물론 그렇지 않은 남편도 친구도 있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경험해본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으니 비혼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고려해보겠다. 우선은 난 비혼 비건 페미 여성들이 서로를 돕고 돌보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미래를 더 그려보고 싶다.


현실은 지금 내가 상상하는 미래와 같지 않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함께 살기 어려울 수도 있고, 함께 살다가 예상치 못 한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함께 살기 위해 오랜 시간이나 더 큰 자본과, 어쩌면 투자나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가까이 또는 멀리 사는 이웃으로라도, 이런 미래를 함께 그려볼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 이야기에 나온 친구들 말고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그런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언젠가 함께 만들 그 미래를 상상하면서 나는 내일도 또 힘내서 일을 할 테다.


작년 설 1월 2일, 숲과 샐러리와 루피와 함께 숲네 집에서 모여 비건 떡국을 먹었다. (모두 비건!)


위에 사진과 이어서, 떡국을 먹은 후 과일도 먹었다.


숲이 선물해 준 조명을 켠 우리 집 거실 (이 조명을 서초에서 망원까지 들고왔다면, 믿어지는가? 사실이다)


작년의 언젠가, 숲과 샐러리를 초대했을 때 함께 먹은 저녁 (역시 모두 비건)



참고

내가 받은 샐러리타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elery_tattoo/


비건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는 비건먼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vegan_mo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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