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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y 25. 2023

부모와 자식의 관계 (1)

생물, 문화, 심리

부모-자식 간에 관계는 그 본질이 무엇일까? 


1. 생물학적으로는 종족 유지, 번식의 관계이다. 


이러한 번식의 본질은 유전자의 보전이다. 유전자 정보체가 육체를 갈아타면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식을 향한 사랑과 책임감은 어쩌면 유전자의 농간일 뿐이다. 이런 생물학적 정리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가족 간 느끼고 바라고 갈등하는 모든 것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현상을 서술하는 한 가지 방향으로서만 가치 있을 뿐이다. 아주 오래된 집에서 집주인이 수 백 년간 수 십 차례 바뀐 것을 두고, '이 집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족들을 교체해 가며 생존했다.'는 식의 소설적 상상과 비슷한 것이다. 


유전자에 있어 자식과 부모는 많은 유사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고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여러 요인을 갖추긴 했지만, 각 생물은 통합적 존재로 파악해야 한다. 이미 인류라는 같은 종에 속함으로써 유전자 정보의 수학적 유사성은 99.9% 이상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는 협력 못지않게 대립으로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과연 이 미약한 유전자의 차이로 가족의 친밀감이 결정되는 것일까? 0.1%의 조합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구별된 생물체로 태어난다. 다만 유전자의 정보 보존(종족보존) 이란 측면에서 보기엔 남의 자식이나 나의 자식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2. 사회문화적으로는 대리 만족의 관계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인류는 궁핍한 시대를 보냈다. 아주 소수만 넉넉한 생활을 했을 뿐, 대다수는 살아남기 위해 여러 육체적 노고를 감수해야 했고, 그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었다. 자식은 이런 바람의 투사 대상이었다. 자신은 부족한 삶을 살더라도, 제2의 자기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이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 어떤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체계적이고 노골적으로 제시한 것이 공자의 '입신양명'이다. (그렇다고 동양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자식이 잘 되면 누구나 기분이 좋다. 게다가 그 사회에서 자식을 뛰어난 점을 보고 부모까지 선하게 평가해 주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이 부분에서 문화적인 면은 그 사회에서 부모를 판단하는 기준이 자식이라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인생에 있어 어떤 결과물로 취급받기에 이 관계는 수단론적 인간관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궁핍을 많이 벗어났고 가진 자가 더 많은 사회에서 자식이 부모보다 뛰어나기가 훨씬 어렵게 되었다. 법적으로도 부모와 자식을 별개로 취급하고 있다. 전 세대보다 못난 다음 세대도 보듬을 수 있는 가치관이 필요해졌고, 수단론적 인간관에 반대되는 목적론적 인간관이 더 선호되게 되었다. (칸트의 용어이지만 딱히 누가 먼저 주장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각자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목적적 가치를 갖는 것이지, 자식과 부모는 별개의 목적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러니 자식을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모든 시대에 통용될 만한 생각이 아니다.



3. 심리학적으로는 상호 의존의 관계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은 당연스럽게 이해 된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장성해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가질 때까지 자식은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들 양쪽 다 본능적으로 이를 알고 있다. 더 많은 도움을 받기 위해 자식은 긍정적으로는 효를 수행하고, 부정적으로는 떼를 쓰게 된다. 가정교육은 보통 이 의존적 관계에 관련한 올바른 에티켓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식의 의존 태도가 세련되면 둘 사이의 관계가 더 부드럽고 활기 있게 된다. 


그런데 의존은 자식만 하는 것인가? 아니다, 부모 또한 자식에게 의존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깊이 있는 관계를 갈망한다. 깊이 있는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마음껏 사랑해도 되는 관계라고 치환할 수도 있겠다. 이상적으로 자식이 부모를 엄청나게 사랑할 수도 있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클 수도 있다. 어쩌면 친구 간의 우정도 가족 이상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며 대부분 현실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자식은 사랑을 주고 표현하는 면에서 매우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존재다. 부모가 창조자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관계에 있어 사랑은 제약이 계속 생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주고 싶어 한다. 그 욕구는 성욕, 식욕 같은 생존적 욕구에 못지않다. 마침 자식이 있으면 그 대상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 또한 자식에게 의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동 전문가들은 육아에 있어 부모와 자식의 존재를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하기를 강조한다. 자식의 독립적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독자적 창의성을 장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해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도, 자식은 실제 부모와 별개의 속성을 갖기에, 이는 자식을 수단(도구)으로 보는 많은 부모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명백히 상호 의존성이 보이는 관계에서 일괄적으로 적용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존하는 두 존재는 반드시 정서를 공유한다. 거의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정서를 두고서, 우리는 '독립성'이라는 선언적 표현에 얽매이기보다는, 정서의 '공유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더 주목하고 연구할 필요를 느낀다. 정서는 언어로 공유되는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더 크다. 여기까지는 불완전한 중간 결론이지만, 이 의존의 관계에서 부모-자식이 무의식을 통해 어떤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지 다시 심층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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