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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y 10. 2023

카프카 [변신], 두려움 그 너머.

어느 때부터 우리는 혐오감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에게 벌레충(蟲) 자를 붙여주고 있다. 맘충, 틀딱충, 정치충, 진지충, 한남충, 반일충... 이런 식으로 그들을 벌레 수준으로 깎아내리고자 한다. 우리도 어쩌면 수가 몇 푼 더 요구하는 걸로 돈벌레 의사로서 취급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지로는 사람이 어떻게 진짜 벌레가 되겠는가? 그렇지만 혐오스럽고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받는 것은 한순간이다. 역사적으로는 계급제가 명확한 사회에서 하층계급이 그런 취급을 받아왔지만,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정치적 대립이 심해지거나 빈부의 격차가 커질수록 '인간 벌레'가 양산될 것이다.


누군가를 비하한다는 것은 그 나름의 공감능력에 기반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 비하를 받았을 때 스스로의 마음이 아파질 것을 상상하여 느낄 수 있기에, 싫어하는 상대에게 그 고통을 줄 의도를 품고 벌레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따라서 비하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근원적 두려움을 끄집어낸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죽어버리라고 하는 건,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주로 쓰는 욕인 '씹할 놈'같은 욕도 내면 어딘가엔 원치 않는 성관계가 큰 두려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기저기 '충'자를 붙여놓는 이유는 스스로가 벌레가 되지 않으려고 가면 안 될 그룹에 딱지를 붙여놓는 것이다. 바글거리고 산만하고 몸속에서 예측 못하게 기어 다닐 것 같은 벌레의 이미지와 똑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아무튼 소설 속 누군가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 버렸다. 별도의 과정이야 있겠지만, 그 세계에서 사람이 벌레가 되는 일은 있음 직한 일이라고 가정하면, 벌레가 되었다는 것보단 벌레가 된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물론 벌레는 혐오스러운 대상의 메타포다.) 그는 서서히 인간성을 잊어갔고, 가족에게 멸시당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 그 죽음은 본인이 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카프카의 시나리오를 꼭 따라갈 필요가 없다. 이 두려운 변신이 나에게 닥쳤을 때, 반대로 그 두려움이 원치 않는 현실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는 없을까? 현실을 가장한 나쁜 꿈에서 깨어나는 길은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변화를 맞닥뜨려 겁에 질려 달아나면서 처음 미완성의 육체는 완전한 벌레로 거듭나게 된다. 모두가 나를 혐오하고 제거하고 싶어 할 때, 그들이 쫓아내려는 것은 나의 일부이다. 실은 인간의 정체성은 영원히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정체성을 찾아 나의 전체를 지켜내는 것이 최선의 해피엔딩이다. 이 악몽을 통제할 유일한 방법은 두려움을 관통해서 그것이 막고 있던 핵심의 정체성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이 살아 있는 의미를 찾고, 앞으로도 더 살고 싶은 마음을 지켜내야 한다.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외롭고 고달프다. 그러나 보여지는 그 삶이 다가 아니다. 그 삶을 두려워하는 감정은 이 상황의 본질을 그대로 투영하지 못한다.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유의 정체성은 오로지 생명체 혼자만이 접근할 수 있다. 파괴되지 않는 정체성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닐 수 있는 의미가 된다. (혹은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증거가 된다고도.) 그러니 외롭다고 정체성에 대한 판단을 타인에게 맡기는 무책임함에 빠지지 말자. '죽은 벌레'를 자처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흘러가며 상황이 변화하고, 개인은 변신하고, 소유한 것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것으로 두려움에 쫓겨 다니지 말자. 존재의 가장 알맹이인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언제까지나 삶을 가까이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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