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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Apr 13. 2023

파친코, 흔들리는 정체성의 쉼터

소설 파친코 리뷰


이 소설의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정체성의 혼란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어주는 것은 뭘까? 이력서에 쓰듯이 이름, 나이, 재산, 직업? 아니면 좀 더 외부적으로 부모, 친구, 지연, 국가, 민족? 반대로 미시적으로 취미, 성격, 신앙? 근본적으로 정체성이란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린 '나' 그 자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글로만 제시할 수 있는 상상이다. 현실 생활에서 벌거벗은 나란 존재는 있을 수 없는 허상이다. 단지 의지가 그러한 자신을 추구할 뿐이다. 정체성의 껍데기를 어떻게 나열해 봐도, 그 모든 것이 현실에서 다 필요하다. 내 가족이 아무리 나를 사랑한대도 내가 직장에서 비실비실 대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이제부터 선한 행위를 추구해 본들, 가족과 친구가 내 인간성을 비난한다면 그 이상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나 이외의 세계에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 설령 신을 가까이하는 독실한 종교인이라고 해도 주변 조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의 운명에서는 더더욱 벗어날 수 없다. 이 굴레를 오로지 억압으로만 받아들이고 억지로 벗어나려다가, 결국은 나 자신까지 잃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속박에 오히려 의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기에 생명을 잃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라를 잃어버린 국민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조선이 사라지고 부득이 타국으로 간 1세대는 언젠가 고향으로 귀환할 꿈을 꾸며 그나마 정체성을 기억 속에 봉인해 둘 수 있지만, 그다음 세대는 그저 이식받은 기억으로 정체성을 떠받치고 있다. 세대를 넘어 갈수록 이 기억은 옅어지는데, 태어난 나라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아무리 동화되려고 노력한들,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이방인일 뿐이다. 정체성의 혼란은 적어도 다음 세 번의 세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첫 세대는 내내 가슴 졸이며 자손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한다. 그저 한탄하며 지켜보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첫째 노아는 모든 정체성의 속박에서 단숨에 벗어나고 싶었다. 가장 사랑한 친아버지 이삭과 자신을 도와준 생물학적 아버지 고한수, 수십 년간 자신을 속인 어머니,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그저 동정받았을 뿐인 연애, 그리고 아무리 좋은 학벌을 쌓아도 벗어날 수 없는 이방인의 꼬리표, 이 모든 것은 속박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가족과 친구와 민족에게서 달아났는데, 다시 어머니를 만난 순간 자신은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태어나던 순간부터 주어진 그 번잡한 정체성에 이미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절망감은 자신을 태워 잿가루로 만들어서야 겨우 풀렸을 것이다. 어쩌면 남은 자손에 대한 속박의 대물림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그는 죽음을 택했으리라.


둘째 모자수는 그나마 가족적 정체성만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비록 이방인으로서의 고난은 있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컸기에 그 시대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버티기는 불가능했다. 노아나 모자수도 쉴 곳은 필요했다. 그들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정체성의 다른 껍데기, 그것이 파친코였다. 험한 일이지만, 능력만 인정받는다면 출신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곳. 그래서 두 형제는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각기 다른 파친코장에서 매니저를 맡고 성공하게 된다. 파친코라는 정체성에 또 의지해버렸다. 노아의 자손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가 없지만,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결국 돌고 돌아 아버지와 같은 세계에 의지해버렸다. 그 아이도 여전히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기에 쉴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어머니인 선자의 인생은 고난과 도전과 상실로 정리할 수 있다. 그녀의 인생은 마치 한 나라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 파란만장했다. 선자는 오로지 자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아갔다. 또한 죽은 노아에 대한 죄책감만큼 노아를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했다. 그것은 의식의 판단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달랐다. 꿈은 자식이 아니라, 그녀가 증오하기 전 젊은 고한수를 택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고한수가 사랑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남은 가족을 너무 사랑하고, 잃어버린 첫째 아들도 보고 싶지만, 그 모든 정체성의 조각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그저 벌거벗은 자기 자신, 정말 아무런 껍데기 하나 없는 마음으로 고한수를 선택하고 또 버렸던 그때의 자신을 가장 그리워했다. 사실은 그 욕망이 지금껏 꽁꽁 눌려두었던 선자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그 근원의 정체성이야말로 지금껏 선자가 죽지 않도록 지켜주었을 것이다. 자식을 포함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여기까지 겪었던 모든 인생의 사건들은 다 그때의 순진한 여인이 경험한 더 넓은 세상이었고 이 여행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노아는 사실 모두를, 특히 아버지 이삭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가족 몰래, 이삭의 무덤을 계속 찾아왔었고, 노아가 죽은 뒤 십수 년이 지나서야 선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선자는 죄책감 없이 노아와 이삭을 한 가족으로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삭의 무덤에 노아의 사진을 심음으로써 둘을 한 자리에 모셨다. 선자 자신이 늙어서야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듯, 아들 또한 그리 할 수 있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자손들도 정체성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개인적인 해석에 따른 각색이 포함되어, 원소설의 정확한 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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