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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Jun 10. 2023

중용 (中庸)

사람의 길

중용은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사람은 앞 날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태가 세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 순간의 소유, 관계, 감정들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현재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감정의 양 극단의 사이, 중간에 위치하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듯이 합리적 이성은 양극단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차분한 이성이 위치하는 그곳이 '중용'의 자리이다. 비겁과 만용 사이의 용기, 증오와 집착 사이의 사랑, 나태와 과로 사이의 근면... 이런 중간 지점이야말로 우리 이성이 선택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인간다운 마음의 종착지이다. 


한편 신이 있다면, 중용은 신에게 적당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은 중간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은 자신의 의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미리 알고 있고, 그 목적에 적합한 마음을 취한다. 무한히 열려있는 정신에 경계를 그어서 유한한 중간 지점을 선택하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적당한 복이 아닌 영원한 복을 주는 것이 신에게 어울리는 행적이다. 단편적인 처벌이 아닌 지옥보다 더한 저주를 퍼붓는 것도 신의 특권이다. 왕을 신처럼 여겼던 시절에, 왕이 사람처럼 적당히 구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왕은 무한한 충성을 요구한다. 그 상위 존재인 신도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그래서 신과 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추구하는 것과 대립한다. 어떤 때 우리는 이런 신적인 정서가 되어 이성의 제한을 곧장 돌파하곤 한다. 어떤 목표에 대하여 광적인 집착을 할 때, 비록 열정이라는 순화된 표현이 있긴 하나, 이는 순전한 인간 정신의 영역을 넘어선 상태다. 어떤 존재에 대한 광적인 사랑도 열애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지만 이 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끝없는 고독과 고통에 견디는 무한한 기다림도 인내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없는 초월적인 마음이다. 우리 자신은 신이 아니기에 그 마음의 결과를 아직 모르지만,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는 정신에 몰입함으로써 신과 같은 거대한 정신에 동화되어 한 순간을 사는 셈이다. 


이성으로 판단하는 세계는 일부 우연을 제외하면 유한한 결정론의 세계이다. 중용으로 덕을 갈고닦는 것으로 인생을 정화할 수는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하다. 결정론의 세계는 하나의 선이다. 하지만 인간의 적절한 지점을 벗어나서 무한한 마음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인생을 전환시키는 분기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그 변화가 반드시 진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와 문명의 전환은 중용이 아닌 영역에서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중용을 벗어날 때 비로소 선이 도형으로 전환된다.


매일 명상을 한다. 오르내리는 마음을 집중시켜 가장 무거운 지점에 두려 한다. 그 안정감 있는 곳이 바로 중용의 자리일 테다. 한편으로는 다른 기도를 한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사소한 문제라고 해도 해결은 내 맘대로 안 된다. 어떤 문제는 광적인 집착과 사랑을 요구하는 듯하다. 이런 것들은 신과 함께 논해야 할 문제이다. 중용의 덕으로는 아무런 변화를 이룰 수 없다. 기도는 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과 함께 결정된 세계를 초월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내 온건한 이성의 바깥을 감싸주고 있는 신이라면 이 어려운 상황에 무슨 생각을 취하려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인간의 미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이 역사가 되려면, 그 이상의 마음이 필요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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