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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Jun 08. 2023

삶을 가까이

며칠 전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에서 누군가 투신을 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내려갔다가 몇 분도 안되어서 급하게 돌아왔고,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길래, 집에서 내려다보니 정말로 누군가 의식 없이 늘어진 채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중이었다. 들 것이 지나간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아이들은 그가 CPR을 받았으나 깨어나지 못했다는 설명을 본인들 아는 지식을 동원해 묘사했다. 나는 그보다 '조금만 일찍 나갔다면, 떨어지는 그 장면을 아이들이 볼 뻔했구나. 어쩌면 부딪힐 수도 있었고.'라고 생각하며, 투신한 사람의 처지보다는 내 아이들에게 별 일이 없음에 먼저 안도했다.  


나중에 혼자 아래로 내려가보니, 핏자국은 이미 씻어서 정리했고, 대신 계단이 박살 나 있었다. 계단은 그가 누워있던 자리가 아니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계단이 이렇게 박살이 났을까? 얼마나 충격이 컸기에 이렇게 멀리까지 몸이 튀었을까?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나는 그의 마지막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졌다. 그가 점프했을 듯한 위치를 추측해, 공용계단의 1층에서부터 뭔가 발견될 때까지 쭉 걸어 올라가 보기로 했다. 높은 층으로 갈수록 심장이 긴장감으로 두근거렸다. 모든 층의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가장 꼭대기층쯤에서 창문이 활짝 열린 곳이 있었다. 그 창에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박살 난 계단과 딱 맞는 방향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아찔한데, 무엇이 그 사람을 과감하게 뛰어내리게 만들었을지 상상해 봤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내가 그 사람처럼 뛰어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확실했다. 내가 더 살기 위해 그의 마지막을 추측해 보았다. 그는 분명 마음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며, 그 고통은 온몸이 부서지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테다. 너무 큰 고통은 두려움보다 강한 것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이런 상상은 점점 불쾌하고 무서워진다. 그의 증명에 설득되고 싶지 않다. 어두운 공용계단에서 나란 존재의 어떤 부분은 창문에 몸을 걸치고 공허하게 바닥을 응시한다. 그 존재가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재빨리 반박해 본다. 


삶에서만 고통이 있을 것이란 기대는 착각이다. 고통은 삶과 죽음, 모두에 속해 있다. 물론 기쁨 또한 삶과 죽음 어디에나 속해 있다. 그러니 고통을 피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선택이다. 만약 삶의 끝에서 들리는 정직한 추도사가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타락과 굴욕뿐입니다."라고 한다면 그 치욕감은 과연 죽음으로 도피한다고 사라질까? 삶의 고통은 삶 속에서 해결함이 옳다. 편안해야 할 죽음의 세상이 삶의 고통으로 얼룩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근묵자흑. 이 세상은 마음이 갖추어진 대로 불러들여진다. 마음 속이 검은 빛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까맣게 칠해져 버린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마음은 항상 삶을 가까이 둘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고통이 있어도 삶에 감사하자. 죽음이란 선택지는 아예 고려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살아갈까만 생각하자. 열린 창문을 닫으며 그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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