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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Jun 13. 2023

어린 왕자

오래전 심어놓은 메시지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처럼 살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로운 인생을 창조해 간다고 믿지만, 의외로 인생 대부분은 주어진 환경과 타고난 성격 및 능력으로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 거의 예정론에 가깝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난단 건, 세상에 없던 존재가 생기는 사건이기에, 자신에게나 세상에게나 모두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런 큰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은 정말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났을까? 어느 정도 예정된 바를 기대하고서 이 세상으로 기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약간의 모순에 도달한다. 현실 세계에서 힘든 환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때로는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보다 더 큰 불행도 있을 것이다. 삶의 목표가 오로지 행복만은 아니지만, 어떻게 예정된 불행을 알고서 태어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불행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봐야 할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현재를 긍정하면서 모든 삶의 과정에서 각각의 의미를 찾는 것이 최선일 것 같다. 현세에 나오기 전, 우리는 아마도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삶의 형태를 선택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태어나기 전 나는 아마도 외로운 영혼이었을 것이다. 외딴 별을 홀로 살아가는 관측자였을 것 같다. 그래서 태어나서도 기질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주변 환경은 단체 활동, 사회적 활동을 자꾸 충동질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그 메시지를 누가 심어놓았을까?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외면의 관계를 신경 쓰면서 내가 겪는 곤란함이나 고단함은 대체로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와 가족, 또 어떤 집단과의 인간적 관계가 잘 맺어질 때 오는 만족감은 그런 모든 것을 상쇄했다. 만약 머릿속 어떤 메시지가 없었다면, 나는 그저 별의 관측자로 변화 없이 은둔했을 것이다. 오래된 나는 내가 홀로 되길 원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마음에 메시지를 남겨 놓았고, 그 메시지는 마치 대화라도 하듯 나를 이끄는 것 같았다. 


작가(비행사, 주인공)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린 보아뱀을 보고 어린 왕자는 어떻게 그 배 속에 코끼리가 있는 것을 알았겠는가? 어린 왕자가 작가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중인격은 아니다. 작가의 원형적 마음, 오래된 존재가 태어나기 전 심어놓은 메시지, 그것이 대화할 수 있는 인격으로 드러난 것일 테다. 어린 왕자, 즉 작가가 태어나기 전에 아쉬웠던 것, 그것은 '깊이 있는 관계'였다. 그는 장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 못 해 상처 줬던 것을 아쉬워했고, 또한 소중한 친구 여우와 사랑을 나눌 시간이 영원할 수 없음도 뒤늦게 깨달았다. 본질적이지 못한 것들은 그전에 충분히 보았다. 권력 놀음도, 부자 행세도, 자기 자랑도 다 부질없음은 별을 여행하던 시절의 경험으로 이미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가 세상에 원하는 것, 즉 태어난 이유는 오로지  장미와 성숙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다. 그는 긴 여행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겨우 알게 되었다. 


작가가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사막에 고립되었을 때, 그제야 자신의 깊은 곳에서 오래된 인격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비행기 수리를 우선적으로 고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만남을 외면하진 않았다. "장미의 가시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는 것이 엔진의 수리보다 중요하다."라고 어린 왕자가 소리칠 때, 이 대화가 인생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의미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마음속 오래된 메시지는 아주 깊은 곳에서 작가를 이끌어준다. 이제 어린 왕자가 장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작가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더 알아보아야 한다. 어린 왕자가 장미를 찾아 소행성으로 돌아갔듯, 작가도 사랑의 사명을 가진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 아마도 소행성 B-612의 장미 또한 현세에 함께 태어나 있을 것이다. 친구로, 연인으로, 어쩌면 자식일지도... 그와 성숙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나도 어린 왕자였던 시절이 기억나면 좋겠다. 걱정거리도 많고, 번잡한 일들이 자꾸 생긴다. 물론 모든 나이별로 각각의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자주 걱정에 빠지진 않는다. 아무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적당히 잘 조율해 놓지 않았을까? 한 번씩 열정의 스파크가 튀는 사건이 있으면 무작정 열심히 해보려 한다. 어떤 태초의 메시지가 그런 마음으로 드러난 건 아닐까 기대해 보면서. 하지만 어린 왕자처럼 좀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주면 좋겠다. 오래된 자신과 좀 더 길게 대화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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