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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Jun 15. 2023

Lovin' Me

사랑의 끌어당김

물리적 법칙의 세계는 '힘'이라는 기준에 따라 중심이 만들어진다. 지구가 아무리 거대해도 더 막대한 힘을 가진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돌고 있다는 것은 사실, 중심으로 당겨지는 작용을 뜻한다. 그 태양조차 아마도 우리 은하 중심의 블랙홀로 당겨지는 중이다. 이처럼 거대한 힘의 작용 사이에서 나란 존재는 그냥 먼지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우주에서 나 하나 사라진 들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세계의 가장 역설적인 신비는, 그 우주가 인지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나'라는 하찮은 존재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지의 중심은 반드시 나여야만 한다. 인지의 세계 또한 결코 작지 않다. 만일 작은 거울을 하나 두고 전 우주를 비춘다고 가정해 보자. 우주의 어느 천체를 짚어내어도 그 천체는 작은 거울 안에 동시에 있을 것이다. 무한과 무한끼리는 통하기 마련이니, 이 거울이 과연 우주보다 작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거울이 인지의 세계이고 자신이 가진 정신의 세계이다. 우주는 객관적 물리의 세계와 주관적 인지의 세계에서 함께 존재해야 하기에 나라는 존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작은 거울인 줄 알았던 인지가 본체이고 오히려 물리적 현상이 큰 거울에 비친 우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 중심을 만드는 것은 물리적 세계의 힘과는 다른 것이다. 바로 '의미'이다. 우리의 인지는 의미 있는 것을 먼저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내 안으로 끌어들여 내 것으로 만드려고 한다. 구심점이 되는 의미의 시작점은 당연히 나 자신의 내면에 있다. 모든 생각이 발생하는 최초의 그 지점이 전 우주 빅뱅의 시작이고 질량의 중심인 곳이다. 진정한 내 중심점은 그렇게 아주 깊은 곳에 있다. 여기를 어떤 의미로 채울지는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다. 광적인 욕망으로 이 구심점을 채운다면 같은 의미를 가진 것들은 더 강렬하게 중심으로 이끌려 올 것이다.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의미가 의미를 끌어들여 커지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막대한 질량의 덩어리가 된 의미는 현실 우주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말장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질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바깥 세계에 대한 온갖 잡다한 지식을 탐구하고 논리를 이해하려는 만큼이나 자신의 내적 세계를 어떤 의미를 채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신문 기사에서 보는 많은 사회 소식은 내 관심사가 아닌 한 그저 피상적인 문제일 뿐이다. 관심과 몰입은 그 소식을 내 것으로 만든다. 똑같은 현상도 내 정신, 의미의 구조에 따라 피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실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하는 것만큼 실질적인 얘기가 있을까? 나 자신을 의미의 덩어리로 만들어 우주를 재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내 구심점에 행복과 지혜가 느껴지는 이미지를 그럴싸하게 채워 넣었다. 또한 풍요로움을 빼놓을 수 없다. 내 구심점에는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넘치는 이미지로 가득해진다. 그들이 돈과 여유와 행운을 끌어들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한, 의미가 현실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윽고 내 지혜는 더 궁극적인 소망을 얘기해 준다. 내가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 아니 내가 사랑받는 것, 그것이 더 궁극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나는 결핍을 느낀다. 의미의 중심점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딸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한다. 나는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미지 삼아 마음속에 계속 채워 넣는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사랑한다. 이 마음에 집중하니, 온 우주가 사랑으로 가득 차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이미지를 확장하여 나를 미워하던 사람조차 반대로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나도 똑같은 미움의 감정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먼저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지의 세계에서 인과관계가 과연 현실에서처럼 중요할까? 그저 의미의 강력함이 이 세계를 좌우할 뿐이다. 그러니 미움이 사랑으로 전환되는 기적을 구심점 안에 먼저 심어 본다. 나는 사랑받고 싶다. 진심으로 사랑받고 싶다. 그 소망을 계속 증폭해서 이 세계에 사랑을 채운다. 이 힘을 깨뜨리지 않고 계속 사랑을 끌어모으면 미움이라는 의미가 사라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까?  


언젠가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이렇게 얘기해 줄 것이다.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봐. 너 자신이 사랑받을 사람인 것을 확신해 봐. 사랑이 사랑을 끌어들이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모두가 너를 사랑하게 될 거야. 마음에 미움을 남겨 놓지 마. 그 미움이 다른 미움을 가져올 거야. 지금 사랑받고 싶다고? 이미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단 거지? 넌 이미 충분한 사랑을 끌어들였으니 그만큼 풍요로운 거야." 그 미래의 자신이 용기를 내라며 이 노래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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