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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Oct 18. 2023

가치의 척도

수치화된 의미 

 일과 사물의 가치를 매긴다면 대부분 가격, 즉 돈을 척도로 삼게 된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이 가격인가? 가격이 가장 직관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좀 더 이상적으로 그 가격을 결정하는 근원은 '의미'의 정도이다. 예를 들어 나는 새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대신 중고폰을 구하기도 하는데, 소위 가격방어에 있어 아이폰이 안드로이드 폰보다 우월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계열의 스마트폰은 기술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비슷한 출고가로 나오지만, 아이폰의 중고가가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기술적 차이 외에도 브랜드 네임이 소비자에게 주는 감성에 독창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어쩌면 허영심과 엮여있다고 해도 의미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다수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겨질 만한 물건은 그만큼 더 큰 가치를 갖는다. 다만 의미라는 것은 돈에 비해 주관적이고 또한 은유적이다. 대중의 욕망을 그 자체로 수치화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결국은 집단적 무의식이 현실에서 수요가 되어 가격으로 현실화되는 것을 보고서, 의미의 크기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실지 의미의 영역은 가격의 영역을 포괄하고도 남는다. 


 돈을 초월하는 것들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이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에 눈이 멀어 인간관계를 망쳤다.', '죽으면 그 돈을 다 싸들고 갈 것인가' 이런 말들이 떠오른다. 이 말들에 나오는 경험, 사랑, 인간관계, 죽음은 의미적 크기에 있어 돈의 의미를 압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사물, 현상의 의미를 논할 때 가격으로 기준을 삼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웬만한 경험도 살 수 있고, 사람을 회유할 수도 있고, 사랑도 좀 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죽을 때조차 자손에게 뭔가 남겨줬다는 안도감이 클 수도 있다. 좀 비약해서 명문 재벌가들을 생각해 보라. 자손들에게 돈과 철학을 함께 넘겨주니 얼마나 명예로운가.)


 사실 같은 가격에 대한 느낌도 현재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오래전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국내에 첫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아웃백스테이크 같은 곳에 두 사람이서 괜찮은 메뉴를 시키면 대략 25000원 정도 나왔던 것 같다. 그 당시는 큰돈으로 느꼈기 때문에 조금 특별한 날에 가는 곳으로 여겼고 그래서 방문했을 때는 사진으로 그날의 기념까지 남겼다. 지금 시기에 어쩌다 가족과 그런 곳에 가면 둘이서 대략 50000원 이상은 나오는데 별로 부담도 안 느끼고 예전처럼 기념을 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을 반영해도 그 정도면 비슷한 수준의 가격이라 볼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예전과 같은 가치를 느끼고 경험하지 못한다. 당연히 내가 학생이 아닌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기존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또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트렌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액 그 자체보다 '의미'의 정도가 훨씬 중요하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상상을 한번 해볼까 한다. 돈보다 좀 더 근원에 있는 의미, 이 의미를 수치화할 수 있을까? 의미에게 화폐와 같은 단위를 붙일 수 있다면 어떨까? 물론 의미를 객관적으로 측량할 수 있을 리 만무하며, 그 의미의 내용도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면 과연 그 측량이 타당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주관적인 세계에서 어느 정도 확고한 위치를 가진 사건들의 의미를 비교 대상으로 선정해 측정한다면, 대체로 일관성 있는 수치화도 가능할 것 같다. 나는 오래전 '사랑의 기술'이란 책을 최초 완독했을 때 느낀 충만감이나 깨달음 등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신이 성장한 기분이었고 나에게 아주 유익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감정을 의미로 삼아 다른 일들을 비교해 보면 적당하지 않을까? 단위는 내 마음대로 구상해 본다. 사랑의 기술을 완독 한 의미는 이제부터 1 mn (meaning)이라고 규정한다. 


오늘 나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독감 걸린 내 가족을 걱정하고 위로하며 간호했는데, 이로 인해 가족을 지키고  가장으로서의 도리도 수행할 수 있었으니, 이 간호 활동이 대략 0.2 mn 만큼 의미는 있다고 느낀다. 주는 것만 아니라 받는 것도 의미가 채워진다. 오늘은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점심으로 받아왔는데 덕분에 아내에 대해 고마워할 수 있었고 즐거운 느낌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것이 0.1 mn 만큼의 의미는 있는 것 같다. 의미를 깎는 일들도 있다. 유튜브로 별 재미있지도 않은 애니메이션 편집 영상을 멍하니 봤는데 보고 나서 오히려 시간낭비를 한 느낌이었다. 이때 0.1 mn의 의미가 차감되어 버렸다. 진료 중에도 내가 집중하지 않고 있다가 엉뚱한 설명만 하고 보내버린 환자가 있다. 물론 이 환자에게도 손해지만 내게도 0.1 mn 만큼의 차감이 있었다. 반면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만 한다면 0.2 mn의 충만감이 남을 것 같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서 내게는 의미가 더해지기도 차감되기도 했다. 하루를 다 보낸 후 내 의미의 지갑을 살펴보자. 다행히 지금 적자가 아닌 0.1 mn 정도의 흑자이다. 그러니 이 글만 완성하면 +0.3 mn의 소득으로 오늘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


 자,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단연코 의미를 채우기 위해 산다고 얘기하고 싶다. 의미라는 말이 워낙 포괄적 단어라 이 정도는 이견을 제시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톨스토이 소설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묻는다면, 의미로도 살고 돈으로도 산다고 답해야겠다. 우리는 의미의 세계에서 정신을 살려주고, 현실의 세계에서 육체를 살려준다. [소망, 사랑, 믿음, 야망, 집착, 분노] 등등 이런 단어들은 의미의 세계의 말이다. [재산, 의식주, 자동차, 교육, 직장, 사업, 상벌, 인맥] 이런 것들은 현실의 세계의 말이다. 나라는 존재 안에서 두 세계는 공존하고 상호 교섭한다. 그러나 분리해서 다루어야 한다. 둘은 명백히 다른 세계이다. 


현실의 세계를 사는 나는 돈을 잘 벌고 싶어 하고, 또한 위험을 대비해 절약하고, 어떤 때는 욕망에 이끌려 high risk, high return 같은 모험도 해보면서 재정적 풍요를 추구한다. 그러나 또한 의미의 세계를 보면서 또 다른 것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한다. 돈을 좋아하면서 또한 더 초월적인 것을 구한다. 두 세계를 같이 채워나가고 싶다. 예전에는 365 의원을 했었다. 거의 주 7일 일요일도 진료를 했는데 그걸로 돈을 조금 더 벌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요일에도 채울 수 있었던 '의미'를 손해 보았다. 일요일에 일하는 것은 0.2 mn 정도의 기회비용을 상실하는 느낌으로 치환할 수 있겠다. 물론 제대로 돈을 벌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도 분명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금전적 이득으로 인한 성취감은 어느 정도 지나니 시들해졌고, 의미의 감소로 인한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혹은 허무감이 커지면서 결국 의미를 잃기만 하는 느낌이 커졌다.


 몇 년 전 나는 한 해를 바쳐서 나름 큰 의미를 구하기 위한 도전을 했었다. 바라는 대로 성취만 할 수 있었다면, 위의 기준으로 산출한 의미가 20 mn은 될만한 도전이었다.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실패했다. 잠시 침울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무엇을 해야 하나 이후로 고민해 보았지만, 그 도전을 이루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의미의 세계에서 대체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달리 생각해서 다른 자그마한 1mn 짜리 도전 20개를 통해 원래 이루려고 했던 소망 못지않은 의미를 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패의 늪에서 헤매지 않고 다른 성취로 전환해도 인생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물론 이럴 때는 우선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의미를 많이 잃었는데, 경거망동하여 의미를 더 잃을 수는 없기에, 긴장을 풀지 않고 앞으로 무엇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지, 편견도 죄의식도 없이 살펴보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나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금전을 관리하는 기술이 부족하다. 돈을 벌기는 해도 어떻게 다룰지 원시적으로 절약하고 단편적으로 투자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전략이 없다. 한편으로는 부동산을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는데, 사실 제대로 이득을 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뻔한데, 운에 기대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금전적 추구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의미의 세계에서도 나는 일확천금을 노려왔다. 자신의 엄청난 성장, 큰 명예의 획득, 혹은 큰 깨달음의 경지, 이런 것들이 마법처럼 튀어나와 삶의 의미를 크게 쌓을 수 있기를 바랐다. 새로운 믿음이 생길 때마다 거기서 곧장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길 기도하곤 했었다. 이렇게 조급해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앞으로 살아가며 쌓을 수 있는 의미가 10년 20년 뒤에는 얼마나 크고 높을까? 작은 의미를 찾고 캐내어 저축하는 마음으로 쌓아간다면, 또한 절약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의미에 집중한다면, 언젠가 내 안의 의미는 수 백 수 천 mn 까지도 적립할 수 있을 것이다. 돈 없던 학생이 사회인으로 돈을 벌며 생활과 외양이 크게 달라지듯이, 의미도 쌓으면 쌓을수록 나의 삶 전체가 어떻게든 선한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을까. 그러니 나의 기도에 좀 더 큰 인내와 희망을 담아보련다. 내가 세상 어디에 있든 산처럼 쌓아 올린 의미와 함께 하는 삶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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