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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Nov 05. 2023

[호밀밭의 파수꾼]

영원한 방황 

0. 총평


사람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주어진 인생의 과제를 풀기에 모자라진 않다. 사람의 지성이 완전한 빛을 내지 못하지만, 절박한 질문에 대해서는 언젠가 답을 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젊어서는 질문이 너무 많고, 늙어서는 질문을 잊고 만다. 과제를 풀고 질문에 답을 하는 깨우침의 때가 있다면, 그 중간쯤에 있음이 분명하다. 순수와 인위의 사이, 욕망과 체념의 사이, 이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질문이 시작되고 또 어딘가에서 대답을 정리하게 된다. 질문에서 대답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질수록 주인공 콜필드처럼 괴로운 저항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쯤 답을 알게 될까? 지금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당장 알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해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망하는 자에게 답은 언젠가 찾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어느 날 우연처럼.


1. 방황 


누구나 자신의 태생적 나약함을 감지하며 방황하는 시기가 있다. 공통적으로는 청소년 혹은 성인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부모에 대한 의존은 점점 시시하게 느껴지고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곧장 독립을 원하게 된다. 자의식은 이미 온세계로 뻗어 나가 있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혀보면 자신의 엉터리 같은 무능함이 보인다. 그 좌절은 결국 세계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환멸 하게 만든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내 존재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선 도리어 그 존재를 거부하는 이 세계에 그냥 순응하고 싶지 않다. 세계 또한 나처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아이는 이제 막 욕하는 법을 배웠지만, 이 세계에 복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욕하고 있다. 그것이 이 세계를 모욕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아이는 이 모순된 세계를 더 철저하게 알고 싶어 진다. 방황은 무지에서 시작하고 인지부조화 속에 멈춘다. 이 상황이 못마땅한 아이는 결국 자학으로 불안과 긴장을 해소한다. 


2. 순수와 위선


내가 잘못되었다고? 아니다.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바로 이 세계에 만연한 위선을 보라. 인간이 창조한 것 무엇에도 위선이 뿌리내리지 않은 것은 없다. 단순한 에티켓에도, 친구, 연애, 학교, 영화와 소설, 또 어떤 위인의 삶이라도 가식 없는 곳을 찾을 수 없다. 바로 나 자신부터가 거짓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세계 전체가 거짓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된 듯하다. 이 거짓의 시스템을 경멸하고 달아날 수는 없을까? 불가능하다. 나려고 해도 갈 곳이 없으니 그저 미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그대로 수용해 보려니,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조금 철이든 청년으로서 내 육체는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는데, 어쩐지 정신은 내 것이 아닌 시스템의 종이 된 것 같다.


청소년, 혹은 이른 청년의 시기가 아련한 옛날 같다. 나에게 그런 방황의 시기가 있었다니. 순수할 때는 분노에 차 있고, 위선을 용인하면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함께 방황했던 친구들과의 시절이 가끔 그립지만, 그들은 그런 시절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고 있다. 그건 좋은 것이다. 오히려 나쁜 상태의 친구도 있다. 방황은 잊었는데, 계속 분노에 차있는 친구도 있고, 계속 무기력한 친구도 있다. 내가 그들처럼 한쪽에 치우쳐버리지 않은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내가 지금 건재한 이유는 보통의 친구들처럼 마치 문제가 없는 듯이 스스로를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모르는 잠재의식은 분명히 얘기해 준다.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아이이고, 나를 괴롭힌 질문은 여전히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잠재의식이 나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의 여러 가지 성격을 억지로 통합시키지 않는 인내를 존중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위선의 말을 타인에게 건네었다고 내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지 않았던 선행을 상황에 따라 했다고 마음에 오점이 찍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단 하나의 인격이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조금 다른 성격을 내세우며 나름 조율하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오늘의 위선에 현재의 나가 고심할 때, 미래의 나가 토닥거린다. "진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지. 괜찮아, 결국 그렇게 될 거니까." 또 누구나 옛날에 잘못한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의 나가 후회의 감정을 내세울 때, 현재의 나가 반응한다. "야, 난 지금 잘 살고 지금 행복하는 것만도 바쁘다고. 그냥 지금의 나를 좀 도와주는데 집중하는 건 어때?" 


인생의 핵심적 모순에 대한 답은 쉽게 구해지지 않을 것 같다. 답이 아직 없는 한 우리는 모두 방황하는 존재다. 하지만 내 안에는 불안해하는 인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내하며 소망하는 단단한 인격도 함께 있다. 이것도 어느 인격이 더 좋다 결론 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혼란을 받아들여보자. 내적인 순수와 외적인 위선이 공존하는 이 세계를 그냥 받아들이고 믿어보는 것도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다.


3. 파수꾼


부모가 되니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가 나에게서 자식 중심으로 옮겨진다. 그들은 아직 어리고 안팎이 모두 순수하다. 그들은 방황하기 전의, 후회하기 전의 나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존재이지만 결국은 나처럼 방황할 존재이다. 아직은 호밀밭처럼 단순한 세상에서, 그들은 걱정 없이 자신들의 놀이에 열중한다. 부모는 이들의 파수꾼을 자처하고 외부의 위협에게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곧 자리 잡을 좌절감과 혼란스러움까지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아이들도 순수와 위선 사이에서 방황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육체적 성장만이 아닌 방황을 통한 내적 성장을 했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가? 나는 자식들이 여기 호밀밭을 떠나 더 너른 세상으로 떠난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의 동료가 되어 줄 수 있다. 내가 지금도 방황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 이 세상에는 절박하지만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도 있음을 그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아이들이 이 호밀밭을 스스로 나갈 때, 나 역시 파수꾼 역할을 끝내고 함께 길을 떠날 것이다. 이 세계가 던진 태초의 질문들에 그들은 괴로운 심정으로 달라붙겠지만, 앞선 경험이 있는 동지가 사고의 수준을 한 단계는 올려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즐거운 미래가 될 것인가! 책 속 콜필드의 부모님도 자식의 방황을 이해함으로써 함께 성장할 수 있음을 믿어주었다면 좋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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