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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Apr 10. 2024

[헤어질 결심], 진실의 선택

헤어질 결심. 헤어지는 것에 왜 결심이 필요할까. 상황에 떠밀려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도 실제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결혼하면 좋아하는 것을 단념합니까?" 나는 여자의 이 말이 영화의 전반적 갈등을 압축해서 제시하는 듯하다. 왜 헤어져야 하는가? 더 이상 필요가 없거나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때 헤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필요하고 아직도 좋아하는 관계에서 헤어지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에 큰 결심이 앞서야 한다. 이 영화 내내 이어지는 갈등이 바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이의 갈등이다. 어느 것이 더 진실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내적인 감정에 충실하자면 외적인 세계를 포기해야 한다. 외적인 진실을 원한다면 내적인 감정을 외면해야 한다. 그것이 한쪽과 헤어지는 선택이자 결심이다.


사실 이런 영화는 조금 불편하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위험한 선택을 한다. 보편적이고 쉬운 방향의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나쁜 남편과 결별할 방법을 더 찾지 않고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 연민을 느낀 용의자에게 애정표현을 하기보단 친분관계로만 남기는 선택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받기 위한 방법이 꼭 극단적일 필요는 없었다. 이런 한쪽에 치우친 선택이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 나름대로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선택이다. 


사건의 진상이 중요한 것처럼, 감정의 진실도 중요하다. 우리 존재의 외적 세계가 경험하는 현상들이라면 우리의 내적 세계는 감정이 거의 다이다. 어떤 좋은 곳으로 여행 갔어도, "아, 거기 참 멋진 곳이었어." 하는 감동이 다 사라졌다면 그 시간은 절반만 남은 기록일 뿐이다. 진실이 없는 경험이다. 반면 고통스러운 한 때를 겪었어도 "그 덕택에 내가 좀 더 성장했어."라는 성취감이 남는다면 그것이 진실이다. 내적 세계에 꽉 찬 감정이 삶의 진실이다. 


위인과 성자들처럼 거창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감정의 진실과 현실의 기만 사이에서 선택을 할 일이 자주 생긴다.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감정의 진실을 설명하기 전에 이미 오해가 깊어진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어한다고 표현할 수도 없다. 특히나 동양적 문화는 감정을 감추는 것을 미덕처럼 전수한다. 진실의 표현은 마치 도박과도 같다. 그로 인해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지만 잃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도박꾼들은 잃는 것에 더 큰 아픔을 느낀다. 


영화 속 감정의 진실. 형사와 여자는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진실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잃을 것이 많고 사랑한단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남자의 이 말을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다."로 이해한 것 같다. 자신의 파괴를 감내할 수 있는 것, 외적 진실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뭘까? 이제 여자가 응답할 차례다. 외적 진실이라는 핸드폰을 바다에 버려도 사랑이라는 내적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용기를 갖고 '자신'이라는 외적 진실, 모든 사건의 원인, 형사의 불행의 근원을 아무도 못 찾을 바다의 한 곳에 숨겨버리자. 여자의 몸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사랑이라는 내적 진실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소중한 것들과 헤어지는 선택을 했다.




여기서부턴 다소 비판적인 이야기다. 이런 헌신적 사랑의 형태는 영화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지만, 현실에서는 좀 더 넓은 사고가 필요하다. 앞서 얘기했듯 다소 치우친 선택으로 느껴지고 감독의 편견도 반영된 듯하여 불쾌감이 조금 유발된다. 감정은 내적 진실이지만, 그 진실은 누구의 결정으로 자리 잡은 것인가? 물론 자신이다. 자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찰나의 순간 감정을 선택하여 내적 세계를 채운다. 감정이 그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뿐이라면 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또한 공감받을 때 위안을 느낄까? 그러니 사랑의 감정으로 마음이 채워졌다고 이후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자동적으로 모든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감정의 선택은 내적 세계에서 일종의 창조이다. 자신이 창조한 것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은 외적 세계에서 가치 있는 일이듯, 내적 세계에서 감정의 창조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갖고 또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게 만든다. 사랑이 인정받고 싶듯, 나의 분노나 두려움이나 의심도 인정받고 싶다. 그러나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이 인정받을 것이다. 가장 적절한 것으로 내적 세계를 채워야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 감정을 찬찬히 살펴보자. 가장 적절한 것은 사랑인가? 사실은 의심이 더 진실인 것은 아닌가? 다른 상황에서 혹은 정말 분노가 진실인가? 사실은 자괴감이 더 진실에 가깝진 않은가? 어쩌면 이 탐색은 영원히 닿지 않을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직하게 살펴보고 선택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대체로 복합적이지만 한 번씩 하나의 감정에 몰입하여 마음의 색깔을 채울 때가 있다. 그날의 진실은 그 감정으로 완성된다. 꼭 긍정적인 것만이 좋다고 볼 순 없다. 정직한 감정을 선택해야 한다.


이 영화는 사랑을 포함한 내적 진실을 지키고자 인간 의지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이야기로 제시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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