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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y 07. 2024

어린이날, 비 내리던 제주도 여행

비가 예고된 연휴, 마치 나의 운을 시험하는 기분으로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강풍을 타고 비행기는 들썩들썩, 승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하늘의 경치는 무척 포근했다.

출발 전 날, 안아줬더니 구름 위에서 자는 느낌으로 흔들어 달라던 둘째 딸.

아이는 뭉게구름이 쫙 깔린 하늘을 보며 바라던 대로 흔들리는 요람 속에 잠들었다.


제주 공항은 습하고 서늘했다. 우리나라에 야자수가 있다는 것에 새삼 감탄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점퍼에 살짝 물방울이 맺혔지만, 우린 실망하지 않았다.

날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렌터카의 뚜껑을 열고 달렸다.

옆에 버스라도 서면,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웠지만 그 자체가 낭만적이지 않은가?

처음에는 긴장한 아이들도 차츰 노래를 부르며 습한 밤공기를 진동시켰다.


큼직한 돔베고기를 썰어 넣은 고기국수로 배를 채웠다.

아이들은 미각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입술과 혀의 촉각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고기국수의 부들거리는 질감을 좋아했다.   

나와 아내가 왜 예전에 고기국수를 좋아했는지 아이들을 보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예약한 호텔은 따듯한 온수풀이 있는 곳이었다.

수영장에 가면 아기 둘을 등에 태우고 토끼와 거북이처럼 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둘 다 무거워져서 동시에 태울 수가 없네.

그래도 많이들 커서 웬만한 깊이는 발도 바닥에 닿고, 숨도 나만큼 잘 참고, 둘이서 수영 경주도 하니,

점프도 시켜주고, 뒤집기도 해주고, 술래잡기도 해주고, 힘쓸 일이 여전히 많다.

요즘은 서서히 내 체력이 떨어져 가는 느낌마저 드는데, 

둘째 20살까지 놀아주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열심히 운동해야겠단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수영장 마감까지 2시간을 잘 놀고도, 그날 더 놀지 못한 것을 여행 내내 아쉬워했다.


둘째 날은 종일 비 오는 날씨였다.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어린이날 노래를 불렀지만, 신나는 노래만큼 하늘이 화창하진 못했다. 

원래는 비를 피해 쌍용동굴이라도 가 볼 계획이었지만, 

막상 한림공원에 가보니 그 동굴까지 10분 정도의 걸어도 홀딱 젖을 폭우와 강풍이라서,

(차 문 열었다가 문짝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생각을 바꿔, 협재해수욕장 앞의 카페로 갔다. 

주차 자리도 아주 운 좋게 하나 생겼고, 

카페 안 창가의 자리는 도로 없이 백사장 바로 앞자리라 경치도 좋았다. 

거기서 제주도만의 음료를 마시면서 각자 책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앞에서는 비를 맞으면서 서핑을 배우는 청년들이 있었다.

아내는 그 모습을 청춘의 낭만이라 했지만, 

나는 비 오는 제주도에서 카페에 앉아 그들과 책 읽는 딸들을 번갈아 보는 것이 최고의 낭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비를 피해 아르떼뮤지엄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은 도쿄에서 미디어아트 전시회(팀랩플래닛)를 본 이후 그런 콘셉트의 전시회를 좋아했다.

비를 피해 실내로 간 것인데,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거리 때문에 결국은 다 젖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시관 내에서는 사진 찍을 곳이 많아 젖은 것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화면이 뜨던지 아이들은 그 그림에 반응하는 것을 서로 재밌어했고, 

딸 둘이서만 재밌어하는 꼴을 보다 못한 아빠(나)도 중간에 끼어들어보려고 창의력을 쥐어짜 냈다.

번개 치는 영상의 방에서는 번개에 맞춰 내가 옆돌기를 하자 아이들이 곧장 따라 했는데 

덕택에 앞으로 길이 남은 영상 하나를 건졌다. 

파도치는 영상 앞에서 다 같이 수영하는 시늉을 하는데  

지나가던 아기가 그 행위를 이해하느라 한참 쳐다보는 것이 웃겼다.


다시 폭우를 뚫고 나름 유명하다는 흑돼지구이 집으로 갔는데,

비가 많이 와서 손님이 없었다.

시간이 많았는지 종업원이 흑돼지에 대해 막 설명을 해주면서,

요즘 뉴스에 뜨는 비계고기 논란에 대해 같이 분개하면서 자기 업소의 차별점을 자랑했다.

그래서인지 고기 맛이 훨씬 좋았다. 

유명 식당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런 곳에서는 아주 적극적이고 성실하고 신뢰감 있는 직원 한 명쯤에게는 응대받게 된다.

사장 혼자 잘 난 것으론 부족하다.

우리 의원은 어떤가? 이런 가게도 살짝 부럽긴 하지만, 

우리 직원들도 좀 더 밀어주고 격려해 주면 좋은 성과를 물어다 줄거라 믿는다.


밤에 숙소에 도착하나 비가 조금 소강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늦은 시간에 갈만한 관광지도 없고, 대신 가까운 올레시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다들 비를 대비해 약간의 방수가 되는 점퍼로 입고 왔었다.

올래시장에는 오메기떡이 아주 맛있었고, 그 외에도 가벼운 기념품들을 사기 좋았다.

아이들에겐 알아서 고르라고 맡겼더니 철석같이 잘 어울리는 모자, 머리띠로 잘 골랐다.

둘이서 서로 귀엽다, 맛있어 보인다면서 난리를 쳤다.

다음 날 회 먹기 좀 어려울 것 같아서, 고등어회 등도 포장했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려던 즈음부터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택시를 타거나, 우산을 사거나, 혹은 나만 다시 숙소로 가서 렌터카를 몰고 오는 것도 생각했지만, 

첫째 딸이 비를 맞아보더니, 별것 아니니까 그냥 걸어가자길래 10분 정도를 그냥 걸어갔다.

다들 비에 젖은 생쥐꼴이 되었지만 아이들은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좋아했다.

옷을 털어 말리고 신발도 드라이기에 말리면서 번잡한 정리가 필요했지만

온 가족이 비 맞으면서 걷는 시간도 여행지만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딸들이 좋다면 아빠도 다 좋다.

그래서 한라산 소주와 함께 먹어본 고등어회는 참 고소했다. 


셋째 날은 화창한 날씨 속에 깨어났다. 

일찍 체크아웃 한 다음, 다시 시장에 들러 유명한 김밥집에서 서서 아침을 먹고

기념품을 아쉬워하는 아이에게 본인들 이름을 레이저로 새긴 목각 샤프펜도 구입해 줬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한다.

나도 내 이름 석 자를 받았는데, 왜 자랑스러워했던 적이 없을까?

분명 부모님은 내 이름을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테다. 

나 역시 내 딸들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하건만, 

이 아이들처럼 이름에 대한 기쁨을 부모님께 돌려드린 기억이 없다.

최고의 효도는 부모에게 받은 것을 기쁘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 그 자체 아닐까?

자기 이름을 새긴 샤프펜을 받고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거창하게 이름을 빛내지 못했어도 내 이름은 부모님의 기쁨이다.

내가 내 이름을 좋아하는 것부터가 효도다.


성산일출봉을 향해 달리는 동안 햇빛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는 오픈한 채로 달렸다.

앞자리는 공기저항이 별로 안 느껴졌는데, 뒷자리에 바람이 다 가서 둘 다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좋다고 노래 부르는 걸 보니 이런 게 일상에서 느끼기 어려운 흥이자 바이브였다.

막상 시간을 들여 도착한 일출봉은 휴업이라며 경로를 막고 있었다.

그래도 매표소 앞 잔디밭과 아래쪽 해안 풍광이 아주 좋았기에 나름 방문한 보람은 있었다.  


전공의 시절, 응급실 당직서면서 연오프 있는 날에 잠잘 시간을 쪼개서 제주도에 왔었다.

그게 벌써 10년이 넘었다. 

첫 번째로 왔을 때 아내와 크게 다투었고 사흘 중 귀한 하루를 허비했다.

그게 너무 아쉬워서 다시 당직 스캐쥴을 조정해 (몰빵 해서) 두 번째로 제주도에 왔다.

그때 성산일출봉을 함께 오르면서 아내에게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하나하나 가리켰었다.

그때 새 모양 바위 보았던 것 기억나냐고 물어보니, 아내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만 추억이 소중한가 보다. 

괜찮다. 오늘 또 좋은 추억을 만들었으니까, 10년 뒤에 물어보면 오늘은 기억하겠지.

아내가 잊으면 딸들이라도 기억하겠지.


일출봉 등산을 못 간 덕택에 시간도 벌었으니, 

마지막 점심으로는 아이 팔뚝보다 긴 갈치구이로 거하게 먹었다.

워낙 갈치가 길어서 종업원이 먹기 좋게 뼈를 바르는 행위조차 마치 공연처럼 느껴졌다.

딸 둘의 입맛이 다른데, 해산물 먹는다니 살짝 삐졌던 첫째 딸도 아주 잘 먹었다.

즉석에서 결정한 식당이 이렇게 맛있다는 점에 감동했다.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감녕 미로 공원이었다.

블로그에 보니 입구에서 출구까지 도달하는데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또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 아이들과 어른들은 따로 출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먼저 떠나갔고, 우리 부부는 15분쯤 뒤에 울타리 너머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물어보니 이미 출구까지 도착했고, 종도 쳤고, 엄마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울타리 너머지만 길은 한참 떨어진 것 같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어봤고, 그들이 역순으로 되돌아와 보겠다고 했지만, 

긴 시간을 기다려도 만날 수가 없어서, 그냥 나가서 알아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고도 우리는 몇십 분을 더 헤매었다. 

아내는 "당신만 믿었는데... 당신만 믿었는데...."를 몇 번씩이나 읇조렸다.

우리 앞에서 울면서 길을 찾던 아이들조차 우리 부부보다 먼저 나갔다.

지나가면서 몇 번 마주친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이렇게 계속 만나면 안 되는 건데..." 했다.

아이들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고 몇 번씩 전화를 했다.

(이 공원을 설계한 사람이 외국인 교수였다니, 확실히 서양물이 좀 들어와야 체계적으로 되는 것 같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을 한다고 하지만, 

내 경험 상, 대부분 문제는 몸으로 부딪혀보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오히려 몸을 아끼면 머리가 고생한다.

아내랑 동시에 다니지 않았다면 혼자서 동분서주하면서 감을 익혀 빨리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갔다.

아내에게는 잠깐 제자리 있으라고 하고, 좀 더 빠르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갔던 길도 반복해서 달리면서 계속 움직여보니 새로운 길이 나왔고, 그제야 출구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뇌의 한계를 알고 이것저것 재지 말고 더 부딪혀보는 것도 인생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부랴부랴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에서 가볍게 식사도 하고, 저렴한 가방도 하나 구매한 뒤,

드디어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직도 여행의 맛에 들떠있는 아이들은 잠들지 않았다.

그렇다. 떠나기 전부터 돌아오는 비행기 안까지, 여행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여정이다.

상상해 보면 첫날 비행기를 타기 전 설레던 마음은 여전히 가슴에 살아 있으니,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주 특별한 경험과 사건이 없는 여행일지라도,

아이들처럼 부푼 마음만 잊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기억에 남는 여행으로 즐길 수 있을 테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배운다. 내 딸들이 잘 커줘서 고맙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배워서

언제까지나 내가 그 둘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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