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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Jun 14. 2024

파이 이야기

사실과 환상

사실과 환상이 역전되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전 나와 헤어졌던 옛 애인과의 인연을 봐도 그렇다. 그녀와 만날 때 모든 사실들이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끝까지 붙잡고 싶어 했지만, 나는 냉철한 시각으로 서로를 위해 적당한 계기가 생겼을 때 연락을 끊게 되었다. 그 시절은 희망고문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좀먹어가던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2년쯤 지났을 때, 비로소 나는 나야말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단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을 갈구했고, 내가 그녀에게 훨씬 더 의존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놓아준 것은 바로 그녀였다. 사건의 의미는 둘로 갈라졌지만, 나는 멀어지는 두 의미 중에서 한쪽을 선택했을 뿐이었고, 그리하여 의식 속 사실은 거짓이 되고, 무의식 속 환상은 이제와 진실이 되었다. 왜 그것이 진실인가? 그래야 그 시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 "왜 나는 그때 행복했던가?"에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역설 중 가장 나에게 와닿는 일화를 제시한 것뿐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I love my wife.)


나는 파이 이야기 속 두 개의 표류기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한다. 파이가 간직한 하나는 무의식의 기억, 그리고 타인에게 털어놓은 다른 하나는 의식의 기억이다. 어차피 이 표류기는 우화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데, 꼭 둘 중의 하나로 진실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화물선이 침몰한 망망대해에서 남은 사람은 오직 파이 하나뿐인데 호랑이와 함께했는지 그저 혼자서 고군분투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두 이야기 모두 결말은 파이가 생존했다는 것이다. 그의 환상 속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 영역다툼, 훈육, 공생, 소통, 연합, 작별, 이게 그냥 살인의 정당화를 위해 둘러대는 얘기라고 해야 할까? 독자들은 어쩌면 살인과 복수가 난무했던 사실적인 두 번째 이야기에 더 끌릴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이야기는 그저 두 번째 사실의 상징화된 환상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 파이는 277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았는가?" 파이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가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살고 싶게 만든 것은 바로 호랑이다. 단순히 호랑이를 상징으로 취급하고서 어떻게 파이의 생존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나도 파이와 같은 뜻으로 호랑이와 함께한 277일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장황한 종교 체험들이 초반에 묘사되어 있다. 파이는 종교를 가리지 않는다. 단지 그 예식을 통해 신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종교인의 질문은 보통 이렇다. "진짜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파이의 질문은 이렇다. "내가 느낀 존재는 신인가?" 파이는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기도 모두에게서 황홀경을 느끼고 환상을 보았다. 어디에서든 신을 만날 수 있는데, 왜 그 종교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교리는 영혼에게 있어 일종의 사실주의다.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 세 종교인들의 다툼을 간디에 대한 언급으로 중재한 것은 숨은 의미가 있다. 간디는 평생 동안 환상을 품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진리라는 이름의 인격신을 느꼈고 진심으로 실체로서 믿었다. 그에게 여러 종교의 신들이란 진리의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일 뿐이었고, 그의 환상 속에서 그 신들과도 소통했다. 비천하고 속박된 인도를 신의 사랑이 가득 찬 땅으로 보았고, 독립된 나라로 보았다. 그의 환상을 수억 인도인에게도 보여주고 믿게 만들었다. 영혼이 실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오히려 환상에 가깝고 그것이 결국은 진리가 된다. 그 환상은 신을 향한 초월적 영역과의 접점에 있다. 어떤 면에서 사실은 허무와 죽음으로 향한다. 반면 환상은 의지와 생명으로 향한다. 망망대해에서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과연 파이를 살려줄 수 있을까? 파이가 한계에 부딪히며 만난 그 존재가 의미 있는 실체며 진짜 동료였고 진짜 신이었다. 


환상을 품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환상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러고 싶은 의지가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딸들. 나는 아직 작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들이 온 세상에 기쁨과 밝음을 주는 환상을 본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이 세상 전체가 더 살기 좋아진다. 그들이 작은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 이 세상의 어두움이 줄어든다. 나는 이 변화를 즐기며 더 열렬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안에 좀 더 본질적인 것, 즉 I를 품고 있는 환상을 본다. 내가 존재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나뿐만이 아니라 내 안의 I 또한 더 확장된 존재가 된다. I는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고 싶어 하니까. 사실에만 천착하면 현상은 서글프게 보인다. 내 딸들은 아버지와 서서히 분리되고 있다. 또한 나는 지난 2년간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자금부족에 시달리며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와 내 자식들이 이 세상과 함께 울고 웃으며 더 큰 존재로 성장하는 환상,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니 나는 내 환상을 존중한다. 방금도 한창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별과 달이 나를 특별히 비추어주는 환상을 보았다. 그것이 진실이란 것은 나만 인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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