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케 히메 (원령공주), 이 작품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화해'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도 그런 시각에서 봤었고, 스토리의 짜임새,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교과서적으로 워낙 완벽해서 왕족 소년(남주)과 늑대 소녀(여주)가 최후에는 힘을 합쳐서 산과 마을의 멸망을 함께 막아낸 결말에서 크게 감동했었다. 그런데 이 결말은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다. 여운을 남기는 연출이라기엔 찝찝한 부분이 많다.
첫째로 자연계 최고의 신인 사슴신은 말이 좋아 자연 그 자체로 환원되었지 산을 개별적으로 지켜주던 그 수호신으로서는 죽어버렸다. 멧돼지 일족이 자연의 기운을 못 받아 점차 작아지고 멍청해졌단 얘기가 있는데, 그게 결국 그 산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운명이 되었다. 둘째, 일본 조정과 마을 주변 사무라이들이 일종의 자연재해에 한 번 휩쓸렸다고 마을에 다시 침입하지 않는단 보장이 없다. 셋째, 결국 자연 생태계에서 자란 소녀와 인간 사회에서 자란 소년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나 이해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지는 못한다. 물과 기름이다. 그저 사슴신의 머리를 노리는 설정상 거대악인 조정에 맞서기 위해 잠시 손을 잡았던 것일 뿐이다. 작품의 초반에 이런 배경이 어느 정도 제시되면, 어차피 이 원한 관계들은 해소될 수가 없고 쉽게 해소되어 봐야 유치한 스토리가 될 것이라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에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감동이 있을 수 있을까?
표면적인 사실이 사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면의 진실은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사건의 발달은 소년이 뒤집어쓴 저주에 있었다. 원한 관계는 서로에게 저주를 내리게 한다. 인간과 동물들은 계속 똑같은 얘기만 한다. "어쩔 수 없다."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서 상대 원한 관계는 죽음 외에 무엇으로도 해소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오직 소년만이 저주를 같은 원한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해결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 소년은 올곧은 품성을 가졌다. 하지만 원한은 그저 소년 하나만 바른 마음을 갖는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사슴신을 만난다고 해소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저주가 마지막에는 씻겨 나갔다. 가장 중요한 진실로 삼기에는 신이 죽은 것도, 자연과 인간이 협력하는 것도, 소년과 소녀가 친해졌다는 것도 다 부족하다. 결국 그럴 수 있을만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주와 원한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 마지막에는 소년의 팔에서 저주가 씻겨 나갈 수 있었을까? (최소한의 흔적만 남았다.)
핵심은 '대속'에 있다고 본다. 소년, 소녀 모두 원한에 찬 저주를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되돌려 놓기를 바랐다. 그들은 처음부터 나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던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인간들이 일으킨 대사건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알고 그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신에게 간청한다. 아마도 기독교적인 원죄론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죄가 아니어도 인류라는 형제의 죄는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니 나의 죄다. 그 죄를 내가 대속할 수만 있다면 나의 희생으로 모두를 함께 구원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자연신의 원한은 소년, 소녀 개인이 아닌 인류에 대한 원한이었다. 개인이 인류가 되어 사과하지 않는 한 화해가 될 수가 없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사회를 논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지만, 우리가 영화의 무엇을 보고 감동을 받았나를 현실에 비추어 깊이 숙고하는 것은 무의식이 적절한 방법으로 현실에 개입하는 통로가 되어줄 테다. 현실에서는 개개인의 원한 관계조차 해법이 복잡하다. 집단 간의 원한, 국가 간의 원한은 해소 방법이 더 요원하기에 결국은 정치적으로 실리적으로만 해결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 한계는 없다. 죄는 벌로써 갚을 수 있다. 두 사람의 원한은 두 사람의 함께 짊어진 죄이지만, 만약 증오스러운 '그'의 죄까지 내가 짊어질 용기를 가진다면 나의 대속으로 둘의 죄는 함께 소멸할 수 있다. 집단과 집단과의 원한도 내가 집단의 대표자가 될 용기로 우리를 괴롭혔던 다른 집단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죄는 함께 소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기독교적으로는 예수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러나 예수가 (혹은 어떤 신으로 지칭하든) 우리의 마음속으로 찾아올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마음이 준비된 자는 화해의 대표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정 갈등이 극한에 달하는 지금, 많은 의사들이 정부나 혹은 자신의 생각에 협력적이지 않은 집단에 대해 거친 표현을 붙여가며 묘사하고 있다. 각자 입장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댈 수사이며 대사이다. '싸우기 싫다. 감정 소모하기 싫다. 평화롭게 살고 싶다. 그저 하던 일 열심히 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정부가 새 아이디어랍시고 폭압적인 정책들을 내놓을 때면 그 앞에서 대응하기에는 유치하고 나태한 마음가짐인 것 같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서로 물과 기름처럼 반목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을 억지로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서 시작한다.'는 대표자의 정신을 갖춤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원한이란 너와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때 더욱 커진다. '의사 카르텔'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 이미 의사는 자신들이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때부터 의사들 역시 정부와 국민들을 향해서 원한에 찬 감정을 투사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투사한 감정이 서로가 공유하는 원한이자 죄가 되었다. 사태가 지금보다 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가더라도 어느 한쪽만 유리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최종적으로 서로의 원한을 씻어내어야 할 때에, 모두의 대표자가 된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가 아닌 자들을 위하여 죄를 대속하고 대신 벌을 감당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 이 글의 결론 역시 영화의 결말처럼 시원하지 않단 것은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언젠가 의정 사태가 진정으로 해소가 된다면 이면의 진실은 아마 누군가의 희생과 대속에 있지 않을까요.
* 미야자키하야오 (감독)가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짐작하며 분석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 자체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므로, 알려진 작가 의도와 관계없이 해석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