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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균형

소망의 발현

by 송고

대부분 일들에 있어 강력한 소망이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간절히 바라는 것은 꼭 이루어진다.'는 나의 지론과 다른 듯 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믿음이 있기에 억지로 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잘못 이미지화시킨다면 이럴 것 같다.


바라는 것을 종이에 수 백 번 쓴다. 어쩌면 혈서처럼 쓴다.

바라는 것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크게 선언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그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교회에 나가서, 절에 가서, 아니면 골방에서라도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기도한다.

졸다가도 누가 툭 치면, "아, 난 이걸 꼭 이루고 말 거야!" 다시금 다짐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간절함은 도리어 소망이 익을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커다란 토양이다.

하나의 소망은 한 알의 씨앗이고, 심어 놓은 것은 반드시 싹이 튼다.

지나친 간절함은 그 씨앗을 믿고서 지켜보지 못하고, 계속 파해져서 제대로 심어졌나 확인하는 것과 같다.

내일 당장 싹이 트지 않는다고 존재가 멈춘 것은 아니다.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우주에서 시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직 존재가 '있다와 없다' 만이 중요하다.


10대의 나는 많은 것을 다음으로 미루는 성격이었다.

책을 잘 읽지도 않았고, 일찍 일어나지도 않았고, 운동을 잘하지도 않았다.

나중엔 똑똑하게 살겠지, 나중엔 일찍도 일어나겠지, 나중엔 친구들과 운동도 즐기겠지.

비록 게을렀지만 씨앗은 심어두었다.

지나친 간절함, 어쩌면 지나친 부지런함으로 마음의 토양을 파헤치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 시절에 미뤘던 모습을 20대에는 어느 정도 달성했던 것 같다.

물론 거저 이룬 것은 아니며,

이 세계가 나에게 적당한 시련과 도전을 주었던 덕택이다.


다만 나의 실수는 씨앗을 심어놓고서

이후에 싹이 틀 그 존재까지 모두 포함하여 '나'라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었다.

누에란 것은 애벌레라는 존재만이 아닌 나비라는 존재를 포함한다.

밀알이란 것은 씨앗이란 존재만이 아닌 거대한 밀밭이란 존재도 포함한다.

내가 마음에 심은 것은 소망의 씨앗만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이다.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내 소망을 관찰하는 신에게, 우주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혹은 내가 수정란으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의 내 전체 존재를 지탱하는 무의식에게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의 소망,

풍요로운 삶, 사랑받는 삶, 인정받는 삶, 가진 것을 모두 발휘하는 삶, 베푸는 삶, 교감하는 삶...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나만이 그려놓은 이미지들의 씨앗이

마음의 토양에 심어졌던 그 자리만을 기억하면서

너무 애쓰지 않고, 너무 발악하지 않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여전히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자 한다.


생각이 복잡하면 운동도 독서도 어떨 땐 식사도 잘 안된다.

내가 소망하는 그 존재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다 잘된다.

그냥 역순으로 시도하는 것으로도 유효하다.

조급할 것 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고, 책을 조심스레 읽고, 식사를 즐겁게 한다.

그것으로 나는 싹튼 씨앗과 이어져 있는 확신을 얻는다.


요새 야간 복싱도 하지만, 어제 오랜만에 장거리 달리기를 해봤다.

운동을 얼마냐 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달릴 때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고, 달리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이 정화되었다.

나의 존재에 균형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아내가 도시락을 싸줬다.

출근 5분 전에 얘기해서 싸준 샌드위치.

아내는 "그게 말만 하면 나오는 줄 알아?" 라며 툴툴대기는 했지만,

내가 "와~ 말만 하니까 진짜 바로 나오네?" 응수하면서 함께 웃었다.

이것도 어쩌면 바라던 씨앗이 발현된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생활의 균형이 잡혀가는 이 느낌이, 씨앗이 심어진 그곳을 적셔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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