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끝인가?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시간은 오로지 살아있는 존재에게서만 흘러갈 수 있습니다. 변화는 시간이 있을 때에나 일어나죠. 죽은 존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인지는 마지막 서 있던 그 자리에 영원히 멈추게 됩니다. 마지막 자리 아래로, 선행과 악행, 지혜와 우매, 긍지와 후회, 어쩌면 비밀까지도 영원히 함께 놓여 있게 됩니다. 제3의 관찰자에게는 찰나의 순간이겠지만 그 존재의 안에 있는 나에게는 영원과 같은 흐르지 않는 찰나가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죽으면 끝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일은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겠죠. 만약 지인이 내 욕을 하고 다닌다고 한들, 그 소식이 나에게 절대로 닿지 않을 상황이라면 그 욕은 실재하나마나 차이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후에 나에게 던져질 좋은 말들, 아니면 비난, 모욕, 오해, 조작된 사실, 저주, 이런 모든 것들은 어차피 온전한 나로서 겪지도 않을 텐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맞습니다. 죽었는데 타인의 말들은 의미가 없죠. 하지만 완벽한 끝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압니다. 죽어서 멈춘 나, 영원을 사는 나 자신의 자기 인식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인식이 의미 있을 뿐입니다.
요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에 대한 뉴스들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복합적인 심정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이로써 끝을 낼 수 있다.'는 기저 심리가 자살을 선택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기독교 내에서 교리에 기반한 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 어떤 형태로든 심판을 받는다는 말조차도 이미 결심한 사람에겐 와닿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실이 지옥 같은 사람에게 과연 지옥이 무서운 곳이 될까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원한 지옥을 겪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천국을 발견해야만 할 겁니다. 적어도 그만한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죽기를 바랍니다.
아무래도 지금 나의 자리는 너무 너저분합니다. 마치 어떤 스토리에서 회수되지 못한 복선들처럼, 의지와 생각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채로 그저 뿌려져만 있습니다. 지난 인생의 조각들, 그들 안에 원망이나 굴욕, 극복되지 못한 좌절, 마치 영원할 것 같은 불가능의 씨앗도 있습니다. 지난 세월, 엄청난 것까진 아니어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주워 올리면서 고칠 수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예컨대 상처 줬던 대상을 다시 만날 순 없는 상황이어도, 그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거나 뒤늦은 사랑과 감사를 통해 수습할 수는 있습니다.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용기 내 하나둘 도전해서 일부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내 자리가 내 존재를 규정합니다.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이 자리를 가꾸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 테니까요.
자신의 과오,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뉴스들은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논란이 있을만한 행적을 보인 사람이라도,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안타까움과 숙연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면 적어도 피해의식과 분노를 남겨서 멈추어 선 채 그것을 영원히 지켜볼 결심을 하지 않겠습니다. 혹은 각종 욕망의 노예가 된 나를 영원히 쳐다보며 슬퍼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여 지금 내 존재가 어쩌다 그렇게 타락해 버렸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그 자리를 말끔히 정리하면 됩니다. 얄팍한 마음에 죽음으로 도피하지 않는다면 각자의 자리를 모두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자책할 것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영겁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늘 지혜로운 욕망과 꿈을 제시합니다. 그 꿈을 좇아 후회 없는 하루하루로 이 자리를 가꿔보렵니다. 저는 과거를 후회하기보다 지금의 내 자리를 더 사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