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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r 15. 2023

마법의 세계관

해리포터를 보면서

나는 왜 아이들이 마법의 힘을 믿고 있기를 바라는 걸까?

왜 산타는 없다는 조숙한 친구의 말을 내가 대신 반박해주고 있는 걸까?

나이 든 어른이 된 지금도 나의 내면, 잠재의식에는 여전히 판타지가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어 수많은 비과학적 사고, 특히나 유사 과학을 배격해 가면서,

마법과 전설에 대한 의식적 믿음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 않은 일이고, 또 잘 갖추어진 이야기는 오히려 어릴 때만큼 신나기까지 하다.

사람은 좋았던 기억을 더 간직하고 싶기 마련이다.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은 어린 시절의 그런 믿음이 나를 더 풍요롭게 해 주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마음속에는 꽃 피지 못한 판타지가 여전히 심어져 있다.


아이들은 헤르미온느의 주문을 따라 해본다. 지팡이도 휘둘러본다.

사실 이 마법이란 시연자의 언어가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지팡이는 더더욱 아니다.

바라는 것을 현실로 드러나게 해주는 것, 그것은 믿음이다. 

마법사의 믿음과 그 마법을 보는 모든 관객의 믿음이 합쳐 마법의 세계관을 만든다.

믿음으로 마법의 '있음'을 만들어낸다.

내가 젓가락 하나를 지팡이 삼아 들고서 아이에게 외친다.

"수리수리 마수리, 개구리로 변해라~얏!"

아이는 갑자기 폴짝폴짝 뛰기 시작한다. 표정이 별로 안 좋다. 

개구리라고 마냥 당할 수는 없다. 

앞서 영화에서 보았던 대로 상대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주문을 읊는다. 

"임모뷸러스!"

나도 주문에 맞추어 최대한 우스꽝스럽게 굳어 버린다. 

그리고서 개구리가 된 마법사의 뛰어난 기억력을 칭찬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우리 세계관은 마법의 시연을 통해 점점 완벽해져 간다.

하지만 분주한 아빠와 딸들과는 달리, 엄마는 이 세계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믿음이 없는 관객은 이 풍요로운 세계를 인지조차 할 수 없다.


답을 알 것 같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착한 어른들이 아이들의 순진한 믿음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더 은밀한 심리는 어른들도 판타지의 세계에서 튕겨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세계를 여전히 지켜주는 아이들을 붙들고, 아직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이 건재함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나는 두 아이들을 끼고 사는 덕택에 이 세계가 마법과 비슷한 것으로 뒤덮여 있음을 매일 느낀다.

소망과 의지, 인연과 필연, 고난과 성취, 이 모든 것은 나의 세계관에서 실재하는 마법의 요소이다.

이제껏 살아온 과정들을 보면, 현실적 해석보다는 판타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쉬운 면도 있다.


왜 나는 종종 힘든 길을 자처했을까? 

그것은 내 안의 소망이 그 고난과 공명하며 진동했기 때문이다. 

여느 마법의 지팡이가 주인을 정확히 선택하듯, 내 세계관 속의 필연이 그 길을 선택하도록 조종한 것이다.

왜 내 삶은 많은 불안한 것들을 품고 있는 걸까? 

그것은 다음 인연과 성취를 위한 요소들이 뿌려진 것이다. 

세계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불안에서 기대로 전환되기를 원하고 있다.

나 삶은 여전히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부분이 많다.

그와 함께 내 세계관도 지금보다 믿음과 정교함이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조금씩 변했다.

어린 시절 상상의 세계에서, 청년기 현실의 세계를 거쳐, 이제 나의 세계는 또 다른 믿음의 판타지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다.

이런 세계관은 혼자만의 생각으로 완성될 수 없다.

또 현실만을 보는 사람은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없다. 

아마도 나는 두 딸들을 믿음직한 동료로 삼아 이 마법의 세계를 영영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세계에서 잠깐 튕겨 나가 버린 내 아내도, 조만간 이 판타지를 되찾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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