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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r 03. 2023

인과응보

마음이 심어놓은 씨앗

'인과응보'는 무엇인가? 

통속적으로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얘기이다.

보이는 것이 아닌 의도가 더 중요하다. 성과가 없었어도 그 의도가 선해야 한다.

그런데 선과 악의 구별이 그렇게 뚜렷하게 되는가? 복은 누가 주고 벌은 누가 내리는가? 또한 복은 무엇이고 벌은 무엇인가?

이런 복잡한 관점에서 보면 인과응보는 어쩐지 인간이 만들어낸 억지 논리가 아닐까 싶다.

이 원리와 반대되는 현상들을 수 없이 보아 왔다.

악인들은 벌을 받지 않았고 선인들은 비극적으로 몰락했다.

그럼에도 나는 인과응보를 믿는다. 왜 믿음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아예 있지도 않은 것을 왜 없는지 토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인과응보가 사실임을 단정 지었고 또한 마지막까지 그대로 주장할 것이다.

여러 이유를 제시할 것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은 믿음이 있는 그 자체가 존재를 증명한다. (일체유심조)

그러니 빈약한 지식으로 논리적 빈틈이 무성하여도 융통성을 갖고 큰 주제를 따라가기 바란다.



인과응보는 많은 사람들의 선험적 믿음이다. 

그것은 무의식 속의 원초적 이미지로 존재하며, 사람의 정신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근원이다.

고차원적 사고가 아니며 거의 영유아기부터 정서에서 드러나는 믿음이다.

아주 원시 사회라고 해서 인과응보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까?

돌도끼 하나를 제작해도 그 석기로 짐승들을 가득 사냥해 오는 결과를 기원했을 것이다.

천둥번개가 칠 때 이를 두려워한 것은 그 원인이 될 생각이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문명의 수준과 관계없이, 인류는 물리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연관된 인과관계를 상상했다.

마음속으로 품은 의도가 비물리적으로 상호 간 작용할 것임을 당연스럽게 믿었다.



마음을 가진 생물은 두 개의 세계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몸은 물리적 세계를 살고, 마음은 정신의 세계를 산다.

육체의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가는데, 정신의 세계는 무엇의 지배를 받을까?

광대한 우주 속에 크고 작은 무생물들, 반면 끝이 없는 추상의 세계 속 온갖 신들.

그들은 각각 자신의 세계에 고착되어 있다.

한쪽은 마음을 이룰 수 없고, 한쪽은 육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본디 나누어진 두 세계를 마치 하나의 세계인 듯, 아예 구별할 필요도 없이 동시에 살아가는 인간은 참으로 축복받은 존재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인과관계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힘'의 작용이며 다른 에너지로의 변환이다. 

반면 정신적 세계의 인과는 '의미'의 작용이며 다른 가치로의 변환이다.

마음으로 대상에게 가한 것은 반드시 그에게 도달한다.

선한 것을 주었던 대상은 그 존재 안에 '선'이 작용한다.

증오심을 주었던 대상은 그 존재 안에 '화'가 작용한다.

사랑을 주었던 대상은 그 존재 안에 '사랑'이 작용한다.

이 작용은 그 가치에 걸맞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이어질 것이다.

남에 대한 작용만 중요한가? 나 자신에게도 무엇이든 줄 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것, 나를 믿어주는 것, 사랑이나 믿음도 나 자신에게 그대로 작용한다.

한 번이라도 스스로를 믿고 무언가를 이뤄본 적이 있다면 이러한 전달이 가능한 것임을 안다.



인과응보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또 좌절은 이 나누어진 두 세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

정신의 세계의 것은 마음의 것으로, 육체의 세계의 것은 몸의 것으로, 

주고 싶은 것은 그렇게 줄 수 있다.

'의미'는 그 대상의 정신의 영역에 닿아서 동등한 가치만큼 작용한다. 

하지만 곧장 육체의 세계에 작용하지 못한다.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은 마음이 닿은 그 사람의 역할이다. 

뉴스에 나오는 악인을 보면서 분노에 차서 그에게 패배나 모욕이나 죽음까지 떠올린다.

그 나쁜 이미지가 상대에게 닿았다고 무슨 차이가 생길까?

그는 곧장 패배하지 않는다, 곧장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을 전체로 통틀어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결국 현실화된다. 

자신을 불행하다 믿으면 더 불행해진다. 

어두운 것을 심어놓으면 전체 인생이 어두워진다. 

우리가 분노 속에 던진 이미지는 그런 어둠의 씨앗이다.

다만 그 씨앗이 그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발현될지는 그의 역할로 남겨진다.



인과응보를 이렇게 마음의 전달로 귀결시키는 것은 조금 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전달되어 그 가치에 걸맞게 발현된다는 점은 

가까운 인간관계에 있어 커다란 도전이 된다. 

바로 가족들이다. 

가족에게 주는 마음은 지금도 그들의 정서 안에서 씨앗이 되고 조금씩 싹을 튼다. 

사랑과 믿음을 주는 가족과 미움과 차별을 주는 가족이 동등한 인생을 살 리가 없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보는 관점과 감정이 허투루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내가 그에게 준 것은 반드시 씨앗으로 심어진다.

어떻게 발현시킬지는 받은 사람의 몫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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