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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r 03. 2023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마음의 선택

*불교의 일반적인 경구 해석이 아닌 개인의 자체 해석과 견해입니다.* 



마음이란 우리의 정신에서 스스로가 실제로 파악하고 있는 의식의 영역과 함께, 파악하기 어려운 잠재의식, 무의식의 영역까지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외적인 현상은 의식의 영역에서 파악하는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본질, 의미야 말로 그들의 진정한 형상이며, 이는 의식보다 깊은 영역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이런 마음의 깊은 영역을 통해 과거 원효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일화가 보여주는 형상,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았다.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문제가 생겨서 다시 신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당나라 유학이 정체된 공부를 한 단계 끌어올려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에 크게 낙담하던 중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겨운 귀향길의 어느 밤, 어렵게 발견한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하며 심한 갈증을 느꼈고, 손 잡히는 대로 바가지 안의 물을 마셨다. 그 순간 그의 관심은 오로지 '마실 수 있는 것'을 찾는 생각뿐이었다. 갈증이 해소되고 편히 잠을 자고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로소 그곳이 동굴이 아닌 무덤이며, 마신 물은 유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확인하고는 심한 혐오감을 느꼈고 구역질을 하였다. 원효는 처음에 부끄러웠다. '내가 아무리 다급했기로 마실 물과 못 마실 물도 구별 못할 정도로 부족한 인간이었던가?' 그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승려였고 올바른 불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사물의 본질을 살펴보는 것이 덕목이기에, 전날의 행동은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미숙함의 발로라고 느꼈다. 지금 마실 수 없는 물은 어제도 마실 수 없는 물이었음이 자명하다. 좌절된 당나라 유학과 초라한 수준의 인내심에 그는 더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는 명성 있는 불자답게 마음을 가다듬고 모든 상황과 자신의 마음을 세심히 관찰해 보았다. 잠시 현재적 감정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을 뜨고 통시적으로 모든 것을 성찰했다. 그리고 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품었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현재의 나와도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첫째, 나와 이 세계의 '관계'에 있어 세계의 모습은 객관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마음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지 결정하는 주체이다. 관계라는 것은 '의미'라고 할 수도 있다. 무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마음은 이미 그 무덤을 안식처로 결정했다. 해골물을 처음 만졌을 때, 마음은 이미 그 물을 마실 물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따라 그는 포근한 잠자리를 누리고 시원한 단물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리적 형상과 의미적 관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은 수소와 산소 분자로 이루어졌으며, 수질은 BOD로 수치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마음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둘째, 실제적인 사물을 넘어서 추상적인 도덕이나 계율도 마음에게 있어 무조건 따르는 것은 최선이 아닐 수 있다. 도덕은 고정된 것이다. 마치 이야기의 배경과 같다. 한 인생을 기준으로 둔 세계관에서 이 모든 현상은 나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둔 희극이다. 그 희극에 주인공을 사칭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도덕이며 계율이다. 그들은 종종 나의 마음을 압도하려 덤벼들지만 실지로는 마음보다 클 수가 없으며, 오직 마음이 먼저 그들을 선택하여 의미를 심고 관계를 맺어주기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욕망에 따른 성공뿐만 아니라 종교적 기준의 성공에도 얽매여 따를 이유가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마음이 먼저 알아본다. 마음이 창조될 때에 이미 '의미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을 능력'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셋째, 그렇다고 대책 없이 마음의 자유롭고 현명한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과연 적절한 태도일까? 인간의 마음은 연약하기에, 순간의 욕망에 기울어지기 쉽다. 우리는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성장의 기회를 놓치거나 이미 가진 것도 잃어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원효도 처음에는 자신의 행동을 그런 무절제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절제란 무엇인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필요 없는 것을 주지 않는 것이 절제이다. 어째서 잠자리와 마실 물이 필요 없는 것이 되겠는가? 그러니 마음의 선택은 필요한 모든 것을 얻게 하여 준다. 다른 모든 필요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주인 되는 자리, 주도권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그렇기에 이 상위의 욕망을 토대로 자신에게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주지 않을지도 마음은 이미 선택해 둔 상태일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과 헷갈리는 욕망 속에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마음 그 자체이다. 당장 앞일을 알 수 없으면 그의 선택이 떨어지길 기다리면 된다. 그래도 못 견디겠으면 마음에게 자꾸 물어보면 된다. 믿는 신이 있다 해도 그는 반드시 마음으로 우선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 원효는 역시나 마음의 힘이 이 세계를 통합시킬 것이라 기대했고, 그에 걸맞게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택했다.)


이제 눈을 뜨고, 원효의 시각에서 깨어나 현재의 자신을 보자.


우리의 일상적 상황은 혼잡하다. 성과 없는 도전, 가족 간의 불화, 악화되는 건강, 가치를 잃은 시간... 완벽하게 순탄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그런 불행한 것에 내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반대적 힘으로 극복하려고도 한다. 즉 불행에 대립하여 행복에게 그 자리를 넘기려고 애를 쓴다. 일부러 웃는다, 일부러 즐거운 일을 찾는다. 욕망의 해소를 통해서 불행을 극복하려고도 한다. 잘못된 판단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선택을 오해한 결과이다. 이 모든 혼잡은 이미 마음이 선택했던 것이다. 필요해서 불행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필요한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그런 선택을 할 것이다. 이미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탐색해서 그 의미를 알게 하고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그 요구는 반드시 달성될 것이다. 이 세계 전체를 재구성해서라도 원하는 것은 얻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이 '일체유심조'이다. 음침한 무덤처럼 주변 세계가 한순간에 포근한 잠자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썩은 해골물처럼 인간관계가 어느 순간 달콤한 만남으로 반전될 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한 자기부정이 아닌, 불행을 온 마음으로 껴안는 도전을 해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 한다. 성공할 수 없는 일도 성취되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불행하다고 느낀 것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 감사야 말로 마음이 궁극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체유심조'를 통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지, 그걸 몇 초만에 만들어 준다고 하진 않았다. 이 세계는 아주 서서히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바뀌어 갈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마음의 깊은 곳은 이미 다 선택을 했는데, 마지막 표층의 의식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불행하고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단순히 행복하고자 태어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것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을 만들어낸 주인이 되고자 함이다. 삶의 의미를 몰라 너무 조급해하다가 이 주인의 자리를 무엇에게든 양보한다면, 그야말로 노예의 삶을 자처하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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