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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r 03. 2023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정서의 차이가 있을 뿐 '인격의 완성'을 꿈꾸는 영혼은 많이 있다. 인지를 못하고 지내는 것일 뿐, 모두 다 단순한 인생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누리게 되길 바란다.


고통이 없는 것, 풍요로운 것, 재능을 발휘하는 것, 명예를 얻는 것, 사랑을 받는 것, 한편으로 베풀고 사는 것...


굳이 욕망의 수준을 구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완성에 닿을 수 있기를 열망한다. 그렇지만 그 욕망이 정확히 완성을 의미하지 못하기에 결국 우리는 허무하다. 무언가를 실패하거나 잃게 되면 슬프다. 다시 도전한다. 결국에 그것을 쟁취하면 이제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새로운 목표를 찾는다. 다시 실패한다. 다시 이룬다. 다시 찾는다. 현명한 관찰자는 여기서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을 느꼈다. 현명한 자일 수록 살 날이 더 많이 남았을 때 이를 깨닫는다. 그는 이 모든 허상의 세계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상태, 즉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했고 더 거대하고 더 궁극적인 이상을 찾는다. 


그래서 그는 멈추었고, 굶었고, 버렸고, 떠났다. 그는 싯다르타였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스스로 태생적 세계를 떠났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는 그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할 한계를 보았고, 그래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자기 세계를 단호하게 버려야 했다. 그 결심만큼 그는 성취를 이루었을까? 두 번의 버림 후에 마침내 승려 고타마를 만났다. 그는 해탈에 도달해 부처가 되었다며 모두가 칭송하는 이었다. 그가 궁극적인 이상에 도달해 있음은 싯다르타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길을 떠났던 친구 고빈다도 고타마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의심은 다른 쪽에 있었다. 


'고타마는 어떻게 이상에 도달했을까? 그에게는 스승이 있었을까?'


싯다르타는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타마는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며, 따라서 자신 또한 스승을 똑같이 따르는 것으로는 결코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자신은 궁극적 이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이지만... 그는 여기서 함께 수행하자고 애원하는 고빈다 마저 버린다. 그리고 그의 정서를 옭아매고 있는 '세속과 탈속에 대한 구별', 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과감히 세속의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러자 옛 수행을 뒤로하고 성적 쾌락과 금전적 풍요를 즐기며 일반적인 사람의 삶에 녹아들고 만다. 


이러한 삶의 변화가 과연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애초에 세속에 녹아들 것이었으면 처음의 태생적 세계를 떠나 부모를 애타게 할 것도 없고, 친구를 떠날 일도 없고, 자신을 혹사시킬 필요도 없이 그대로 다 해볼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반드시 겪어야 할 경험이 있다. 경험은 말로써 전달되지 않는 느낌을 남긴다. 그 느낌이 이후로 자신을 인도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알게 된 자신의 느낌에 충실한 것이다. 두려움이 많은 마음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얽매여 버린다. 그 이후가 무엇이 되든 그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싯다르타는 비록 세속의 사람이 되었어도 사랑과 부와 명예에 매달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든 각각의 순간에 충실했을 뿐이다. 십수 년은 넘도록 쌓아온 것은 그에게 하룻밤의 유희와 경험일 뿐이었다. 느낌이 그를 다시 떠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가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헤매는 사람이고, 그의 안식과 수행을 뱃사공과의 동행에서 겨우 찾았다.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지 제삼자적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그런 느낌을 정확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사공에게서 강의 소리, 즉 세계와 내면이 공조하는 소리를 듣는 법을 배웠고 그 소리는 태초의 소리라고 할 수 있는 옴(Aum) 소리였다. 이 소리를 통해 이 세계와 그가 하나로 되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그는 어렴풋하게 이 모든 것이 궁극에 도달하는 과정이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지막 경험이 남았다. 속세의 애정이 남긴 인연, 싯다르타를 사랑했던 여자가 죽으면서 남긴 그의 아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했으며, 그를 올바르게 키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저속한 욕망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하고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아버지의 정결한 사고방식은 아들에겐 오히려 증오심까지 일으켰다. 싯다르타는 거의 처음으로 인연에 대한 집착을 느꼈다. 그는 자식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하게 되었고, 자식이 겪을 시행착오와 온갖 위험들을 걱정하며 바르게 이끌어주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는 보통의 가족적인 삶을 누리는 평범한 아버지들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지금껏 수행해 왔던 삶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출한 자식을 더 이상 쫓아가지 않음으로써 집착을 내려놓았다. 강가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이 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는 또 한 번의 각성을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이란 다 그대로의 가치가 있음을 알았고, 수행을 하는 자신도, 가출한 자식도, 부자의 삶도, 기생의 삶도, 모두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았다. 기존의 어렴풋한 느낌이 승화되어, 그들 모든 것이 통틀어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궁극적으로 그의 모든 수행과 경험은 이 '하나'의 존재(단일성)를 느끼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싯다르타와 그의 친구 고빈다와는 두 번의 만남이 더 있었다. 한 번은 세속의 인간으로 다른 한 번은 세속에서 도피한 사공으로 만났다.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그렇게 좋아했었지만, 다른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며 단숨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여전히 열성적인 수행자였던 고빈다는 최초의 붓다 고타마의 투영이다. 비록 성인이었지만 여전히 미숙한 채로 만났던 첫 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각자의 마음이 서로 다른 것만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싯다르타도 고빈다도 자신의 확고한 사고에서 더 진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이 되어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고빈다는 수행의 한계를 느끼며 좌절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기이한 인생을 이제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 했고, 싯다르타는 친구에게 말이 아닌 입맞춤으로 '하나'의 깨달음을 전달해 줬다. 고빈다는 그 느낌을 이해했으며,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것이 결국 친구의 깨달음과 똑같은 것임을 명확하게 알았다. 그렇다면 고빈다의 지난 고행들은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싯다르타가 '하나'에 도달하기 위해 멀리 돌아서 와야 했듯이, 고빈다 역시 반복적인 고행의 시간을 통해 얻은 회의가 진정한 느낌을 넘겨받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모든 경험은 다 이렇게 중요하다. 모든 윤회도 그 자체로 소중하다. 우리는 그저 경험과 느낌에 감사하고 충실해야 할 뿐이다. 




참고: 역사적 부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이야기 속에서는 이미 부처가 된 고타마와 그에게서 일부러 떨어져 다른 경험을 통해 궁극의 이상을 향해가는 싯다르타가 있다. 그 사이를 고빈다가 이어주면서 결국 모든 경험, 깨달음, 이상, 결국은 모든 존재들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작가는 모든 사물과 경험에 신성(불성)이 깃들었음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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