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들. 언니가 먼저 들어간 학교에 동생도 들어갔고, 언니가 먼저 입단한 오케스트라에 동생도 결국 입단 했고, 둘이서 똑같이 타악기 파트를 맡았어요. 그전까지도 둘이서 어린이집, 유치원, 놀이, 운동, 미술, 심지어 친구까지, 지금껏 참 많은 것을 공유해서 좋았습니다. 동생은 늘 언니를 보며 자라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까지 그들의 무대에 끼어들어갔습니다. 원래 학교 어린이 합창단이 따로 있어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을 때면 2 곡 정도 늘 합동 공연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곡 수를 늘리고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성인 멤버들이 필요하대서 반강제로 아내가 차출되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기존에도 합창단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그저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 것이죠. 그래서 요즘 다른 학부모들과 연습하고 온 날이면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잘 불렀나 나에게 자랑을 하더군요.
1시간 일찍 퇴근해도 공연의 1부는 못 봤습니다. 늦게 2부로 입장했는데, 멀리 합창단 속에 있던 아내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네요. 평소에 이처럼 반가워하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이 순간을 즐깁니다. 2부가 시작하니, 첫 곡은 서곡, 합창은 없습니다. 아내는 침묵하며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타악기가 언제나 그렇지만, 별로 화려하진 않기에 관객의 귀에 꽂혀 들어오는 순간은 잠깐입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두 아이의 시선이 곡에 완전히 집중해 있다는 점과, 내가 막귀이긴 해도 드럼이든 실로폰이든 트라이앵글이든 그들이 두들기는 타이밍만큼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죠. 언니는 늘 침착합니다. 큰 공연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전혀 걱정하지 않죠. 하지만 둘째는 오늘 아침에도 긴장감에 온갖 짜증을 내면서 작은 사건에 눈물까지 짜면서 등교했죠. 하지만 첫째든 둘째든 이 무대에서는 아침에 봤던 그 아이들이 아닙니다. 둘 다 살짝 힘이 들어가긴 했어도 자기만의 리듬을 타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주로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때, 둘은 자기들만의 리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내 아이들이 타악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여전히 화려하게 들리는 쪽만을 주인공으로 여겼을 겁니다. 이제 내 귀에는 타악기가 주인공입니다. 아이 둘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할 겁니다. 연주에 가장 집중한 연주자가 그 곡의 주인입니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인 소프라노가 나설 차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다음곡으로 합창이 시작되자, 그 많은 아이와 어른들의 목소리, 군중의 소리 속에서 아내의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따로 들리는 착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노래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합창을 하면서 가장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내일 거라 믿어봅니다. 마음속에서 잠시 딸들 대신 아내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줍니다. 나중에 본인도 "내 목소리 들었지?" 하면서 근자감을 보이네요. 그럴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중요한 존재로 살고 싶어 합니다. 오로지 중심에 서겠다는 생각에 안달나 있으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회피하고 싶은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욕심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이 직면한 상황이나 대상에 온전히 집중할 수만 있다면, 순수한 의미로 그 한순간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타인의 허락이 아니라 마음이 그 영역을 얼마나 품고 있는가로 결정되는 것이죠. 두 딸들도, 아내도 각자의 영역에서 주인공으로서 그 시간을 즐겼다고 믿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세 여자가 한 무대에 섰네요. 내가 지금껏 본 모녀의 모습 중 가장 조화로운 상태인 것 같습니다. 자기실현의 길은 참 다양하지만, 그들이 함께 가는 성장의 길에 왠지 나만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쉽네요. 처음에 애들이 아빠도 같이 무대에 서자면서 졸랐었는데, 미친 척 병원문 닫고 연습 나갈 걸 그랬나요? 그래도 가족 중 나까지 관객에서 빠지면 누가 이 아름다운 장면을 눈에 담아줄까요. 나에게는 언젠가 또 나만의 기회가 오겠죠? 이제 그들이 이 합동 공연 무대에서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에서도 마음에 그 순간의 모든 것을 품은 주인공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 가족,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