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
0. 에펠탑
여행의 시작은 에펠탑.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주변이 평지이다 보니 그 육중함이 더 확실하게 체감된다. 큰 조형물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매일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에펠탑. 각 나라마다 인공적 랜드마크는 있지만, 파리의 에펠탑만큼 상징적 효과가 큰 것은 없을 것 같다. 감상은 아이의 스케치로 대신한다.
1. 밀레의 '만종' (오르세 미술관)
예전에 백화점 미술 전시회에서, 그림을 실물 원작으로 보면 심미안이 생긴다는 화가의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름 있는 작품들의 실물을 연달아 보고 있으니 그 말이 떠올랐다. 현장을 걸어가면서 본다는 약간의 촉박함이 그 작품의 세밀한 면을 더 살펴보도록 해주었고, 또한 선과 색의 이면에 작가가 심어놓은 진심을 통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원작으로 본 '만종'은 역시 교과서적으로 알고 있던 대로 숙연한 분위기가 돋보였지만 그와 더불어, 무명의 농부와 아낙네에게서 은은하게 번지는 특별한 아우라까지 보였다. 그것이 어떤 채색 기법으로 인한 기술적인 것에 의했는지, 단지 명작이라는 선입견에 의한 확대 해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아우라가 있었다. 작가의 세계관, 가치관을 최대한 잘 반영하기 위해 그림 기법은 여러 사조로 변모해 왔겠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느낌'이 아닐까 싶다. 관찰자가 그림 속 무언가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실체가 된다. 기존에도 사진과 영상으로 충분히 보았던 작품이지만, 오늘의 느낌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들은 두 손을 잡고 경건하게 세상의 시련을 감내할 마음가짐으로 그저 이 삶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들을 감싼 아우라가 설명해 준다. 그림 속의 존재가 아니다. 그림은 내 마음의 거울상이라고 여기면 된다. 그들이 짊어진 것은 내가 마음에 담은 세상 전체의 무게이고, 그들의 감사하는 것은 내 마음에 살아가는 인류 전체의 행복이다. 그러니 두 사람은 먼지처럼 뿌옇게 살아가는 인류 속에서 그저 프레임에 포착된 티끌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것을 감사할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작품을 선과 색깔이 아닌, 실체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 바로 나 자신에게만 그 의미가 보인다. 내가 품고 있고 또한 나를 감싸고 있는 온 세계에서 나는 그 농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또한 나 자신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함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이 품은 의지의 아우라를 볼 수 있다면 나도 자신의 세계를 정화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나 역시 이 삶을 감사하고 사랑하고 또한 희망을 가짐으로써, 이 인류의 삶을 지키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마음속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지어다. 이 울림은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이 세계의 섭리를 믿고서 두려움 없이 감사하고 사랑하며 기뻐할 때라는 뜻이다.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평가 - 나의 사회적 능력과 지위 -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빛을 먼저 스스로 내어야 한다. 빛이란 곧 의지다. 어떤 화려한 인생도, 반대로 보잘것없는 인생도, 한 인간의 본질적인 빛은 어떤 존재로 살아갈지에 대한 결심이자 의지로 밝혀진다. 내가 남에게서 볼 수 있는 빛이라면 나도 그 빛을 낼 수 있다.
2. 승리의 여신, 니케 (루브르 박물관)
지금 시대에 와서 믿지도 않을 그리스 신을 언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은 예술 사조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여신에 대한 숭배는 그 유효성이 다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 보게 된 이 여신의 본질은 전통적 숭배나 미학적 분석에 있지 않다. 옛 시절 여신은 근사하고 아름다웠겠지만, 인간에게 있어 신의 본질은 이름과 형상이 아니라 그들이 주는 명확한 '느낌'이다. 두 팔이 없어도, 한쪽 날개를 잃었어도, 이 여신은 반드시 날아오른다. 반드시 내 편이 되어 싸워준다. 그렇게 날아서 나에게 닥친 모든 장애를 도도하게 넘어서 버린다. 이 당위성은 불변이다. 그 불변성이 여신의 본질이다.
마치 데려온 자식이라도 친자식이라고 믿으며 키우듯, 작품의 위대함은 원작자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관찰자의 몫이 크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 전시물이 정말 진품인지에 대한 의심도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심지어 작품의 진위도 관찰자의 인식이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엄청나게 오래전 만들어졌음에도 세부 묘사가 매우 정교하다는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나도 놀랍게 느꼈고, 아름답게도 보았다. 하지만 진품이던 가품이던 그 본질에 있어, 정작 내가 이 여신을 보고 어떤 승리의 기분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작품은 나의 세계에서 큰 가치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나는 그런 맥락에서 찬찬히 이 작품을 뜯어보았다.
아무런 두려움과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 거침없는 발걸음, 세상을 향해 활짝 편 가슴, 언제든 다시 날아오를 준비가 된 날개와 주변에 딱 알맞은 바람... 얼굴도 손도 없지만, 여신이 어떤 표정으로 있을지 손이 얼마나 당당해 보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여신이 나의 편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용기가 샘솟을까? 기억하자. 예술품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상이다. 내가 이 작품에서 진정한 승리의 확신과 기쁨을 볼 수 있다면 그 여신의 본질은 내 안에도 있는 것이며, 내 인생이 향할 모습이 된다. 앞서 밀로의 '만종'을 두고 얘기했듯이, 작품이 품은 아우라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곧장 내 마음의 세계가 같은 의미의 힘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 니케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나는 여신과 함께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니케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 의심과 불안을 무력화하는 '승리' 그 자체를 나의 세계에서 누릴 것이다.
3. 디즈니랜드 폐막쇼
Live in magic. Find your magic.
설명 가능한 현상과 인과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건들의 진행. 이러한 힘의 역학만으로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하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누렸고, 너무 큰 보호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자신의 소망을 함께 본다. 주관적 세계는 의지를 품고 한다. 동심의 세계는 이러한 본질에 가까운 상태이다. 어릴 적 우리 세계는 그저 산만한 상상의 나열이 아니라, 욕망, 소망, 사랑, 행복 등과 같은 감정이 모든 사물에 담겨 있는 의지의 세계였다. 어른이 되어서 현실적 물리관계에 좀 더 집중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물리적 인과관계를 따라가기 때문이지만, 통시적 관점에서는 어릴 때의 세계관이 오히려 세계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의지가 현상을 바꾼다. 마법처럼 짠! 하고 물리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사물에 부여된 존재 가치가 그 사물의 본질을 결정한다. 우리는 어릴 때 소중했던 물건들을 지금 어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 물건의 운명은 사랑으로 인해 바뀌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군중들 틈에서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폐막식 내내 업고 있었던 딸아이. 이 아이의 운명도 나의 사랑과 믿음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아마도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본질이 우리 안에 있기에 사랑 노래는 마음을 잡아끈다. 마찬가지로 'Live in magic' 이 마법에 대한 노래가 나의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내가 속한 세계의 본질 속에 '마법'도 있기 때문일 테다. 우리의 의지가 이끌어내는 변화, 내가 부여한 존재 가치가 그의 운명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마법이다.
옛날도 지금도 나는 의지가 만든 마법을 기대하여 내 인생을 만들어왔다. 이번 파리 여행에서도 새로운 의지를 다지게 되으니, 감내와 감사라는 의지, 승리를 향한 의지, 내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 이들 마음이 모여 결국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는 마법을 일으킬 것이라 또 믿는다. 함께 쇼를 보는 내 아이는 그 순진함으로 이런 마법을 나보다 더 믿을 것이라 생각하니, 우리 가족의 운명은 참 다채롭게 이어질 것 같다. 긴 인생, 힘들거나 어려워도 이번 파리 여행처럼 쭉 즐기면서 삶을 누리길 바랄 뿐이다. 나도 아이도. 그리고 아빠가 대신 찾아줄 수도 없는 자신만의 마법을 아이가 꼭 찾게 되길.
* 공연일에 폭설이 내려서 영상의 불꽃쇼는 생략되었지만, 상상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