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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17. 2022

2인자 브라크와 드랭의 작품 세계

브라크의 <바이올린과 물병(1910)>

이인자란 표현은 지나치게 세속적이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와 앙드레 드랭(Andrè Derain, 1880~1954) 모두 야수파에서 활동했다. 그중 브라크의 <바이올린과 물병>은 한 눈으로 봐도 분석적 입체주의의 정수를 표현했다. 공간과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분석·해체·조립하고, 검은색·흰색·갈색·회색을 한정적으로 사용했다. 맨 위 중앙에 못이 있다. 그림자를 포함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입체감을 묘사했다. 그러나 물병과 바이올린은 깨진 듯하다.  1908년경 야수파가 소멸한 이후의 변화다.

그의 입체주의적 경향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모든 자연은 원통형, 구형, 원추형으로 환원된다”는 세잔의 이론이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잔의 기하학적 특성과 다시선(多視線)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차별성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세잔은 하나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반면, 브라크는 형태를 해체했다. 그리고 핵심적 모습만 남겨두고, 색채를 단순화했다. 그러자 바이올린과 물병의 물성(物性)이 선명해졌다. 반면, 주변 형태가 주름 잡힌 천처럼 모호하다. 명암법도 일관적이지 않다. 이와 관련, 곰브리치는 재미난 상상을 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생각할 때 신체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과 마음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본 바이올린의 형태를 한순간에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사실 그렇게 한다. 그 형태들 가운데 어떤 것은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분명하게 떠오르고 어떤 것은 흐릿하다.” 


마음으로 본 바이올린이 실재(實在)의 그것보다 특징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눈은 받아들이고, 뇌는 형태를 결정한다”는 세잔의 전략과 같은 맥락이다. 브라크의 변화는 1907년 ‘독립화 예술가협회(La 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 앙데팡당) 전시회’가 끝나고 시작되었다. 그해 5월, 새로운 회화 소재를 찾아 지중해와 근접한 시오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동료 프리에스(Emile-Othon Friesz, 1879~1949)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 풍경에 흠뻑 취한 브라크는 열다섯 점 남짓한 풍경화를 그렸다. 주의 깊게 지켜보던 드랭은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에게 “그 친구가 정말로 추구해야 할 그림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탁자 위의 과일 그릇과 빵(1909)>

그의 예상대로 브라크는 마지막 야수주의 작품 <미스트랄 호텔에서 바라본 에스타크(1907)>, <레크 만(1907)> 등을 끝으로 입체주의로 전향했다. 1907년은 피카소가 최초의 큐비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완성했을 때다. 이 작품에 압도당한 브라크는 <거대한 나부(제목 그림, 1908)>를 완성했다. 이후 브라크가 큐비즘에서 피카소의 위협적인 경쟁자가 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진해졌다. 1908년 각자 여름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왔을 때 서로 그린 그림들이 너무나 흡사하여 깜짝 놀랐다. 둘은 익명의 미술을 추구했고, 늘 붙어 다니며 활발히 토론했다. 

그랬던 것이 피카소의 <탁자 위의 과일 그릇과 빵>을 보면, 하단에 하얀색으로 쓴 서명이 등장한다. 집단적 탐구라는 신념이 희미해지고, 개별적 모험을 시도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피카소는 1908년 이래 정물화를 즐겨 그렸다. 샤르댕의 작품을 참고했지만, 브라크의 영향도 받았다. 작품의 간결하면서 엄격한 느낌, 주로 노란색이나 녹색을 기본으로 색을 제한한 점이 그 영향이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극단적 해체에 들어갔다.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모호했다. ‘분석적 입체주의’라고 부른다. 

브라크의 <바이올린과 파이프(1913)>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1911년부터 브라크는 인쇄된 편지와 신문 조각으로 콜라주 작업(파피에 콜레 papier collé, 붙임종이)을 했다. 물감에 모래나 톱밥을 섞는 새로운 기법도 개발했다. 사물이 해체된 여러 형태를 나열하는 대신, 대상의 이미지를 한 가지로 통합하는 ‘종합적 입체주의’의 시기다. 채색은 배경으로 들어가고, 형식적 조직을 강조했다. (안네 간테퓌러-트리어, <입체주의>) 활자체를 도입하고, 질감을 표현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각했다. 그림이 아니라 아예 물체를 만들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브라크의 <바이올린과 파이프>와 실제 등나무를 사용한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1912)>이 부족한 설명을 보완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브라크의 기법을 공유한 피카소는 ‘실험하고 있다’는 평가를 부정했다. 그는 예술이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최초’라는 개념은 애당초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말도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술을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이런 관점에서 곰브리치는 이렇게 뼈를 때리는 한 마디를 던졌다.


“모든 사람은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새의 노래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가?”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14년 8월 2일, 피카소는 참전하는 브라크를 아비뇽 역에서 배웅했다. 이때 두 사람은 미술 세계에서도 작별을 고했다. 브라크는 크게 다치고 돌아와 공백 기간을 보낸 후 복귀했다. 선이 부드러워졌으며, 정물화에 경사된 채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러나 예술은 의리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미술에는 전진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끝없이 의심했고, 그 의심은 만족을 없애고 감성과 시적 통찰력을 연마케 했다. 초현실, 추상, 심지어 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자유롭게 작품 활동했다.


드랭, <콜리우르의 나무들(1905)>

드랭은 1905년 여름 동안 지중해 연안의 작은 항구 콜리우르에서 최초의 진정한 야수파 그림들을 완성했다. (에디나 베르나르, <근대 미술>) <콜리우르의 나무들>에서 나타나는 나뭇가지는 빨갛다. 또 분홍이고, 파랑이고, 회색이다. 절대색은 없다. 화가의 주관에 따라 달리 색을 배합했다. 대중은 “어떻게 나무가 빨갛고 노랗지?” “얼굴에 초록색은 말이 안 되잖아?”라는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이미 고갱이 “조화를 위해서라면, 색을 임의로 사용할 권리가 화가에게 있다”고 대변한 바 있다. 야수주의는 색의 임의 사용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고 가 결국, “색채를 해방했다.” ‘자연의 재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압되어 있던 원색의 원시성을 회복했다는 의미다.

<콜리우르의 나무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진 숨은 뒷이야기가 있다. 드랭의 혁명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유대인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1939년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비서를 시켜 소장품 몇 점과 함께 이 그림을 파리 은행 금고에 맡겨 놓았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비서는 프랑스를 탈출했으나 1942년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됐다. 작품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반세기 만에 극적으로 발견된 그림은 다시 30년간 소유권 다툼이 지난 후 볼라르의 미망인에 의해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2010년 6월 22일 경매 낙찰 가격이 무려 1,630만 파운드(한화 약 300억 원)였다. 


드랭의 <콜리우리 항구(1905)>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1931)>

드랭은 흠모했던 마티스, 블라맹크와 함께 강렬한 원색과 빠른 붓질로 야수와도 같은 거친 그림을 그렸다. 같은 시기의 작품 <콜리우리 항구>가 유명하다. 항상 색에 취해 있던 그는 야수파 중에서도 대담하게 색채를 다루었으며 특히 붉은색에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격렬한 감정을 추스른 드랭은 그 틀에서 벗어났다. 

입체주의, 아프리카 미술을 탐구하다가 고전주의로 보수화했다. 이때의 작품 중 하나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이다. 세잔의 정물화를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제목도 따왔다. 색조의 탐구가 두드러진다. 탁자 왼쪽에 쏠려 있는 과일의 따뜻하고 밝은색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어둡게 했고, 오른쪽 빈 접시 위 배경은 조금 밝게 처리함으로써 사물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미래파를 창시한 이탈리아 화가 카를로 카라는 이 배경색을 일컬어 이렇게 평가했다.


“강철 같은 회색’이 드랭에 의해서 가장 개성 있고 표현력을 가진 색채가 되었다.”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


그는 야수파를 함께 이끈 마티스보다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입체파에 영향을 미쳤고, 실험정신이 강했던 그의 노력을 고려할 때 조금 불공정하다. 최근 프랑스에서 재조명이 한창이라고 한다. 그는 말년이 불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베를린에서 가진 개인전으로 인해 친독파로 몰렸다. 두 명의 사생아 출생, 그리고 이혼, 그는 자기 회의에 빠졌는데, 1954년 샹프루시에서 화물차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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