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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14. 2022

피카소의 여인과 작품, 그리고 돈

<장님의 아침 식사(1903)>

열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피카소는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 함께 파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듬해 2월 17일 카사헤마스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짝사랑하던 모델 제르맨 피숏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고 저지른 행동이었다. 크게 상심한 피카소는 검푸른색이나 짙은 청록의 색조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용한 절망의 색조였다. 이 청색시대(1901~1904)를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 바로 <금욕주의자(1903)>와 <장님의 아침 식사>에 등장하는 텅 빈 접시들이다. (에르민 에르세, <피카소의 맛있는 식탁>) 

하지만 1904년 런던 코톨드 전시회의 두 번째 전시장에서는 고작 한 달 사이에 모사 화가에서 대가로 성장한 피카소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기 영웅들에게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그들의 아이디어가 자신이라는 필터를 거치게 함으로써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면서도 그 영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이때 불규칙한 수입으로 고생하던 그를 도와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준 여인이 페르낭드 올리비에다. 7년간 사귀었다. ‘바토 라부아’에 살던 시절로, 그녀는 동네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며 방랑벽이 있는 피카소를 한 자리에 묶어 두었다. 그러나 ‘오달리스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는 결혼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어떤 조각가와 동거하고 있었다. 

<라팽 아질에서(1904~1905)>

색채가 다양해지는 ‘장밋빛 시대(1905~1907)’로 접어들 때의 대표적 작품이 <라팽 아질에서>이다. 피카소가 편안함을 느껴 자주 찾던 곳으로, 포도주 포함 2프랑에 만족할 만한 음식을 제공했다. 수잔 발라동의 사생아 모리스 위트릴로가 연작을 남겨 유명해진 곳이다. 피카소의 첫 전시회를 조직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1906년 그의 그림 30점을 모두 사들였다. 금화 2천 프랑을 지불했는데, 이 정도면 3년 동안 아무 걱정 없이 지내기에 충분한 돈이다. 장밋빛 시대가 끝난 1908년 초겨울에는 어떤 그림을 팔아도 친구들을 불러 기꺼이 축하 파티를 열 정도가 되었다. 


피카소는 두 명의 처와 다섯 명의 여인과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 모두 예술적 영감을 제공한 ‘뮤즈(Muse)’였다. 이들과 나눈 사랑, 이별, 쾌락, 그리고 슬픔의 감정을 모티브로 불멸의 명작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1911년 두 번째 여인 에바 구엘(마르셀)을 만나 몽파르나스에 새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1915년 에바가 급성 폐렴과 결핵으로 사망했고, 1918년 디아길레프 러시아 발레단 무용수였던 올가 코흘로바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생활에 안정을 찾으면서 올가와의 사이에서 첫아들 파울로를 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생활 패턴과 성격상의 문제로 갈등했다. 

러시아 해군 제독의 딸인 올가는 피카소가 가난한 시절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차단했다. 대중은 피카소의 삶이 화려하고 난잡했을 것이라고 예단한다. 하지만 그는 미술밖에 몰랐던 천상 예술가였고, 그 외의 개인사에는 절제가 없었다. 1927년 어느 날, 우울했던 피카소는 갈르리 라파예트 백화점 근처 지하철역에서 열일곱 살 마리 테레즈 왈테르를 만났다. 청순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에 빠진 피카소는 모델을 제의했고, 그녀는 올가가 채워주지 못하는 빈 곳을 메꿔주었다. (제목 사진;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

올가와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갈등이 심했던 피카소는 1932년에서 1933년, 무려 18개월 동안 창작을 포기했다. 최악의 상황은 1935년 6월에 벌어졌다. 올가가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운데 재산분할 문제로 여러 변호사를 고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해 마리 테레즈는 딸 마야를 낳았다. 이때 몸은 인간이고 머리가 황소인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 연작이 등장한다. 그의 예술적 본능과 미쳐버릴 것 같은 현실 속에서 탄생한 초현실적인 모티브다. 미노타우로스는 제우스가 소로 변신, 에우로파를 납치해 낳은 자식이다. 투우를 좋아했던 피카소를 상징했다. 그러나 순진했던 금발의 ‘에우로파’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그녀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도라 마르를 사귀면서 버림을 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피카소 사후 4년이 지나 저승에서 그를 돌봐야 한다며 목을 매 자살했다. 


<우는 여인(1937)>

1936년 지인의 소개로 만난 도라 마르는 당시 최고의 초현실주의 예술가 중 한 명인 유고슬라비아 전문 사진작가였다. 강인한 성격으로, 반파시스트 그룹에도 참여했다.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문제를 비롯하여 당대의 정치적 이슈에 관한 지평을 넓히는 데 한몫했고, <게르니카> 완성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와 관계를 이어가면서 여전히 잦은 여성 편력을 보이는 피카소로 인해 자주 울었다. 피카소는 이런 그녀를 모델로 <우는 여인>을 그렸다. <게르니카>의 스케치에 기초가 된 작품이며, 정중앙에 찢긴 손수건은 고통의 은유다. 

자유분방한 피카소는 1943년에 젊은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면서 결국, 지배 욕구가 점점 강해지는 도라 마르와 헤어졌다. 질로는 클로드와 팔로마 남매를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피카소의 작품은 낙서조차 황금으로 변했다. (인고 발터, <파블로 피카소>) 그러나 지적이면서 유행에 민감했던 질로 역시 피카소가 동생과 바람을 피우자 이별을 선언했다. 이어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10년 동거생활을 회상한 <피카소의 삶(1964)>을 발간했다. 이 사이 피카소는 두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연인 자클린 로크와 만나 1961년에 결혼했다. 당시 피카소는 자식이 부모의 거울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자기 작품을 돈으로만 대하는 자식들의 천박성에만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청색 시대’의 작품 <바르셀로나의 지붕>을 보고 있는 자클린을 향해 피카소가 회화에 관한 그의 인식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바르셀로나의 지붕(1903)>

“그 그림을 정원 햇살에 내다 놓아보면 알게 될 거요. 그림은 빛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이 바라다봐줘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법이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은 삭아가는 것이라오. 그건 인간과 마찬가지요. 그림은 은행 보관함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파는 것도 아니오. 모든 것을 감수하지만, 우리는 그들 곁에 있는 것이라오.” (페피타 뒤퐁, <자클린과 파블로 피카소에 관한 진실>)


다행히 자클린은 피카소의 생각을 공유하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1973년, 피카소가 아흔두 살을 일기로 사망하자 그의 세기적인 유산과 상속 문제가 연일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마흔일곱 살 그녀는 흔들림이 없었다. 피카소의 사랑을 많은 이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단 한 작품도 돈을 받고 팔지 않았다. 작품을 기증했고, 각종 전시회에 빌려주었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이 최대 수혜자였다. 자클린의 도움으로 일찌감치 3,000점이 넘는 작품을 기증받았다. 

그러나 1975년 큰아들 파울로가 간경화로 죽은 이후 국면이 바뀌었다. 두 명의 적법 상속인은 정식 결혼을 통해 낳은 자식, 즉 올가가 낳은 파울로와 자클린의 외동딸 카트린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텡이 대통령이 당선되고 개정된 법령으로 인해 혼외자(婚外子)인 클로드와 팔로마 남매, 그리고 마야가 적법 상속인으로 인정되었다. 재산 배분을 둘러싸고 다툼을 계속되면서 시중에 피카소 작품이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자클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982년 피카소의 고향 바르셀로나 미술관에 42점의 도예 작품과 성병에 걸린 매춘부의 초상화 <고깔모자를 쓴 여인>을 기증했다. 뉴욕의 MoMA에 <선원복을 입은 마야(1938)> 등 3점, 그리고 1986년 여름에는 <머리에 노란 리본을 맨 자클린(1962)>을 아이슬란드 정부에 양도했다. 파블로가 살아 있을 때 이미 57점의 데생 작품을 기증한 아를의 레아투 미술관에는 <마리아 피카소 로페즈의 초상(1921)>이 함께하게 되었다.


마흔일곱 살에 홀로 된 자클린은 피카소 사후 13년 동안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상속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술과 수면제로 겨우겨우 버티던 그녀는 1986년 10월 15일 새벽 3시, 오른쪽 뺨에 차가운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의 산이 바라보이는 보브나르그 성(城)에서 장례를 마친 후 남편 곁에 묻힘으로써 비로소 영면에 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의 외동딸 카트린이 문제를 일으켰다. 1986년 10월 25일 피카소의 생일이자 자클린이 죽은 지 열흘 되는 날, <마드리드에서의 피카소> 개막식이 열렸다. 스페인 국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마드리드의 현대미술관(Meac)에는 그녀가 기증한 피카소의 유작 61점이 전시되었다. 카트린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곤 어머니 의사에 반해 기증에 이의를 제기했다. 작품은 모두 1987년 1월 17일 파리에 있는 파리바 은행 특수보관실에 보관되었다. 아! 단 한 점 <프랑스를 위해 목숨 바친 스페인 사람들에게(1947)>만이 남아 <게르니카> 옆을 지켰다. 사제였던 자클린의 작은할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오, 빌어먹을 돈, 지옥에나 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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