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대 입체주의 화가 후안 그리스(Juan Gris, 1887~1927)의 경력은 이 그림,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향 선배 피카소에 대한 어마어마한 존경심을 표현한 작품이다. 군 복무를 피해 스페인 마드리드를 떠나 프랑스에 도착한 그리스는 1906년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바토라부와르(세탁선)>에 합류했다.
1910년부터 무정부주의 잡지에 풍자 삽화를 그렸다. 그러다 1912년에 <앙데팡당전>과 〈섹숑 도르〉전에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입체주의 활동에 돌입했다. 분석적 입체주의가 2단계 '종합적 입체주의'로 탈바꿈할 때였다. 사물이 파편처럼 어지럽게 부서지는 형태에서 간결하게 한 가지 이미지로 종합되었다. 이를 위해 그간 배제되었던 원근법, 명암법, 다양한 색조 등 기존 회화의 전통적 가치를 되살리고 오브제 선택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었다. 초기 입체주의보다 대상의 사실성과 현실성이 한결 뚜렷하다.
이 작품에서도 변화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초상화라는 점이 명확하다. 빨강, 파랑, 노랑 그리고 검정 물감의 팔레트는 작품의 주인공이 화가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끌로 깎은 듯한 면 처리(단호함), 몸을 젖히고 앉은 자세(여유와 자신감), 반짝이는 눈(영민함)은 바로 피카소란 인물의 캐릭터이다. 입체주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던 칸바일러는 그의 잠재력을 확신하고 그해 10월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칸바일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조심성이 있으면서도 결연한 그리스를 잘 알게 되면서 나의 탄복과 호의가 증가하였다.” (안테 간테퓌러-트리어, <입체주의>)
이론가 그리스는 “세잔은 병에서 원통을 만들지만, 나는 원통에서 병을 만든다. 세잔은 건축물을 향해서 작업해 들어가고, 나는 건축물로부터 작업해 나온다”고 했다. 명료하고 질서 있는 그만의 연역법적 구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정물화를 탐구한 결과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정치적 긴장감 속에서도 신문, 사발, 컵, 커피포트 그리고 병 등 일상 오브제들을 혼용한 주제를 다뤘다. 입체주의의 모호성이 그로 인해 사라졌다. 설명이 어렵게 들린다면, 그의 유명한 작품 <열려 있는 창>이 도움을 줄 것이다.
구상(具象)으로서 이미지가 분석적 입체주의보다 선명하다. 덧붙여 그의 회화에 독특한 서정성이 담겨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다가온다. 그래서 거트루드 스타인이 정통 입체파로 피카소와 그리스 뿐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나 보다. 한편 입체주의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했고, 이론적으로 대변했던 화상(畵商) 칸바일러도 대표성을 지닌 화가로는 1세대 피카소와 브라크, 2세대 페르낭 레제와 그리스 4명만 꼽았다. 이래저래 입체주의에서 그리스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리스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처럼 입술이 도톰하니 잘 생겨서 여성들이 많이 따랐다. 그림처럼 삶과 사랑에서도 선명했던 그는 1927년 40세의 나이에 신부전증으로 요절했다.
피카소와 같은 해에 태어난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는 1907년 세잔의 회고전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1910년 칸바일러 화랑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작품을 본 이후 물체의 부피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2년간 조형성과 씨름했다. 1911년 ‘살롱 데쟁데팡당’에 출품한 <숲 속의 누드>를 비롯하여 초기 특징이 잘 드러나는 <발코니> 등 생경한 입체주의 작품이 탄생했다.
발코니, 그 좁은 공간에 마치 깡통 로봇들이 떼 지어서 모여 있는 양감(量感)이 특징적이다. 윤곽선 내부의 삼원색, 특히 빨갛고 파란 색채를 성글게 칠했다. 구, 원뿔, 원통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했던 세잔에 동조하는 태도다. 미술가들의 거류지 ‘라 뤼슈(벌집)’에서 만난 조각가 알렉산더 아르키펭코(Alexandr Porfiryevich Archipenko, 1887~1964)와 우정을 쌓으면서 튜브와 롤러 형태의 작품들로 자신의 방향성을 잡았다. ‘부피와의 싸움’으로 표현했을 정도이며, ‘튀비슴(tubuism)’이라 부른다.
칸바일러가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에 주목하고, 1913년 3년 기간으로 독점 계약을 맺었다. 이후 다채로운 원통 형상이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미술사학자 베르너 스피스는 “세잔의 새 회화적 공간에 대한 촉각적 연구”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색채에도 관심이 깊어졌다. 다채롭게 색을 칠했다. 부피감을 부여하는 흰색과 검은색 그림자를 제외하고 원색의 빨강, 파랑, 그리고 노랑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그러나 들로네와는 달리 두 개의 보색을 병렬하지 않았다. 각각의 색채가 순수한 독립성을 확보케 하려는 의도였다.
프랑스 입체주의 화가는 기계 문명과 밀착되는 특징을 지녔다. 레제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하여 대포, 비행기 등을 스케치하면서 ‘기계 시대’로 이어졌다. 찬란한 햇빛 속에서 75 구경 대포의 열린 약실을 보곤 말을 잃었다. 금속 위에서 햇빛이 벌이는 변화는 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전우들로 인해 평생 평범한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선에서 겨자 가스 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종전한 그해 <프로펠러(1918, 제목 그림)>를 그렸다. 평면과 입체감이 공존하는 방식은 이전 ‘형태들의 대조’ 연작과 다르지 않지만, 강렬한 색채와 원판은 로베르 들로네에게 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티브는 6년 전 마르셀 뒤생과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함께 항공 박람회 때 목격한 잔상이다. 세 사람 모두 프로펠러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는데 뒤샹은 이렇게 감동을 전했다.
“회화는 끝났어.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겠나? 자네가?” (캐럴라인 랜츠너, <페르낭 레제>)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브랑쿠시의 <공간의 새(1928)>가 이때 잉태되었다. 레제는 도시의 산업화에서 도출되는 이미지에 집중했다. 그의 걸작 <도시>가 완성되었다. 구상과 추상이, 평면성과 입체성이 리듬감에 실렸다. 종합적 입체주의를 레제의 방식으로 소화했다. 건축가 도제로 있으면서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 그는 1920년 이후 순수주의(purism)의 창립자인 아메데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Charles-Edouard Jeanneret-Gris, 1887~1965)를 만났다. 입체주의가 보여주는 단순한 주제에서 벗어나 인간과 기계, 그리고 기술 사이의 관계로 확장했다. 특히 기능성에 집중했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공감이 컸다.
당시 파리 예술계는 지나친 아방가르드를 포기하고 고전주의적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질서로의 회귀’)이 휩쓸었다. 레제도 루이 다비드, 앵그르 등에서 영감을 받아 과장을 배격하고 간결성이 두드러졌다. 엄격한 구성, 단순화된 볼륨감,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풍경 아래 무표정한 인물 표현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제는 역사적 서사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의 일상이었다. 1931년에 초청받아 뉴욕에 있는 넬슨 록펠러의 아파트를 장식할 때 우아함과 척박함이 섞인 도시의 거친 풍경에 매력을 느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1940년 11월 미국으로 피신했다. 예일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자전거 타는 사람, 음악가, 운전사, 건축 인부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캔버스에 담았다. 또한 들판에 버려진 농기계에서 영감을 받아 기계적인 요소로 병치한 일련의 연작을 완성했다. 1945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단색의 균일한 색으로 넓은 부분을 칠하고 굵고 검은 윤곽선을 사용하면서 노동자 계층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했다. ‘유급 휴가’와 관련 노동자 가족의 자전거 여행이나 피크닉을 찬양한 <여가-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가 이때 수정한 작품이다. 공화주의를 실천한 신고전주의 자크 루이 다비드에 대한 경의는 자전거 아래 앉아 있는 여인의 손에 쥔 종이에 담겨 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속 편지와 상통한다. 레제는 인간 형상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세 악사(1944)>, <건설자들(1950)>, <붉은 배경의 대형 퍼레이드(1953)>를 그렸으나 1955년 갑작스럽게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