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연작과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Ⅱ>
로베르 들로네의 <에펠탑> 연작
화학자 외젠 세브릴이 쓴 <색채의 조화와 대비>의 영향이었다.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는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형태를 색채만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렇게 1909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에펠탑> 연작을 완성했고, ‘에펠탑의 작가’라고 불렸다.
에펠탑,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만국박람회 기념물로 선정되었다. 당시로선 공화국 테크놀로지의 자존심이었으며, 철재의 가열 정도와 바람의 세기를 과학적으로 계산했다. 이렇게 해서 대갈못을 박은 1만 5천 개의 개별 조립 부위들이 사용되었고, 구조물 겉면에 유리창이 부착되었다. 외부는 철제 교각을 지으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고딕식 골조 건축의 전통 양식을 따랐다. 하늘을 찌르듯 솟구친 높이, 무게, 그리고 역동성 등 한마디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찬미하는 기계주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제목 그림은 1911년 <에펠탑>)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1912년 ‘황금 분할’ 전에 전시된 들로네의 몽환적인 그림에서 입체주의의 기존 형식과는 달리 주제 선택에 있어서 심리적 동기가 작동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이 서정적 성격을 띤 추상을 새로운 큐비즘(입체주의)이라는 의미로 ‘오르피즘(Orphism)’ 혹은 ‘오르픽 큐비즘(orphic cubism)'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유시인, 리라 연주의 명인인 오르페우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어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에 매우 다양한 화가를 포함했다. 칸딘스키와 마케, 마르크, 마이트너, 뮌터와 이탈리아 미래파 화가 등. 좀 더 좁은 범주 내에서는 피카비아와 뒤샹, 레제를 포함했다. 그러나 사실상 들로네 부부만이 탐구를 이어갔다. (에디나 베르나르, <근대 미술>)
입체파와 순수 추상 사이에 있었던 들로네는 인간의 과학적 발명품에 매혹되었다. 에펠탑, 비행기, 대관람차가 대표적인 그의 모티브다. 분광학에 취해 있던 과학적 관심의 연장선에 있었던 듯싶다. 입체파의 구성을 포기하지 않고 시간적 개념을 추가했다. 실제 그의 작품들은 초기 입체주의 작품들에 비해 색채와 그 구성에서 파격적이며 운동감(혹은 리듬)을 중시했다. 특히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를 통해 미래파적인 발상과 강렬한 감정을 표출했다. 입체주의 이론을 대중화시킨 인물도 들로네이다. 실제 에펠탑은 색이 이렇게 다양하지 않다. 주변이 건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그저 평야에 철근 구조물만 홀로 우뚝 서 있다. 이른바 파리의 랜드마크이자, 오벨리스크다. 그의 연작 중에는 실제와 비슷한 주변 모습을 담은 <에펠탑(1922)>도 있다.
넓은 벌판으로 형성된 파리와 같은 도시의 탄생은 고대 로마 군단의 진지 공사와 관련이 있다. 평지의 방어 설비와 직사각형의 반듯한 도로망을 갖춘 야영지가 로마식 도시의 출발점이었다. 카이사르가 원정길에 오른 유명한 ‘갈리아’ 지역이 오늘날 서유럽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BC 6세기부터 켈트족이 살던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일대, 즉 라인·알프스·피레네 및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한다.
철탑은 원래 20년 후 해체하기로 했다. 그러나 투자비가 아까워 방송용 안테나를 설치하면서 300m의 높이가 320.755m로 성장했다. 전파(라디오파)는 높이를 두 배로 올리면 신호는 네 배 더 멀리 간다. 그러니 당시 파리로선 에펠탑만큼 장거리 송신에 유용한 구조물이 없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반대가 심했다. 흉물스럽다는 이유에서이다. 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작가 모파상은 “파리에서 에펠탑을 유일하게 안 볼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라며 탑 1층 전망대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파리뿐 아니라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미추(美醜)의 구분은 함부로 재단할 일이 아닌가 보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Ⅱ>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그의 형 자크 비옹과 조각가 레몽 뒤샹-비옹을 통해서 입체주의에 접근했다. '오르픽 입체주의'에서 잠깐 활동했는데, 그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Ⅱ>를 둘러싸고 갈라섰다. 이 작품은 작가 개인, 혹은 양식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원근법을 해체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분절했다는 점에서 외형상 입체주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4차원 공간에 '시간'의 차원을 더했다. 페르낭 레제의 <발코니>에서 묘사된 형상과 비슷한 누드가 계단을 내려오는 일련의 과정을 시차를 두고 겹쳐 표현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묘사했다. 속도의 미와 역동성을 지향하는 미래주의 기풍이 강했다.
1911년 뒤샹은 작품을 파리에서 열리는 '입체주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그런데 알베르 그레즈와 다른 주요 멤버들이 그에게 제목을 바꾸던가, 아니면 작품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편협하다고 느꼈다.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위선에 대한 그의 반감은 이때 잉태되었다. 화가 치민 그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가져왔다. 그리고 1913년 20세기 최초의 아트페어(여러 개의 화랑이 한 곳에 모여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행사)를 개최한 뉴욕의 '아모리 쇼'에 다시 출품했다. 군대(제69 보병연대) 무기고였던 장소라 하여 '아모리 쇼(Armory Show)'라 불렸다. 앵그르, 들라크루아로부터 인상주의자, 그리고 마티스,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참여한 가운데 뉴욕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미술전'이다. 사실주의에 머물러 있던 미국의 미술계로서는 뒤샹의 입체-미래주의 작품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곧바로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뒤처진 미국 화단에서 활동하면서 미술의 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입체파들의 태도에 그의 회의감은 '시각적인 그것 만이 회화일까?'라는 근원적인 의심으로 진화했다. 결국, ‘예술의 정의’와 관련한 질문은 소변기를 작품으로 한 <샘(1917)>에서 다시 한번 표출한다. 그 재미난 이야기는 뉴 암스테르담(뉴욕)으로 공간을 옮겨 지속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