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혁명 이후 서구사회의 기계 문명은 가속화되었다. 더불어 삶의 속도가 빨라졌다. 차제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가 <르 피가로>의 1면에 ‘미래주의 창립 선언’을 발표했다. 기계문명과 미래에 대한 열광적인 믿음은 저돌적이고 요란스러웠다. 오래되고 낡은 문화를 공격하면서 그는 “힘차게 달리는 나선형의 경주용 자동차가 <사모트라케의 니케 승리상>보다 아름답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미술이 속도와 무한한 에너지를 약속하는 과학기술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1882~1916)의 조각 <공간 속에서 연속되는 하나의 형태>가 그것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해석한 조각으로 몸 전체가 입체주의 형식으로 분산되고 서로 걸리는 옷자락을 묘사했다. 즉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운동의 역학을 표현했다. 그러나 마리네티의 선언은 오랫동안 특별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예술적 발전을 목표로 국수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전쟁을 찬양했던 그는 1933년 파시스트 정권의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 이탈리아 화가 자코모 발라와 보치오니, 그리고 카를로 카라(Carlo Carrà, 1881~1966) 등이 “새로운 시대의 미(美)는 속도의 미”라고 화답하며 미래주의를 이끌었다.
이런 광신적인 움직임은 키리코를 비롯한 다다이스트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고정된 시간에 머물렀던 회화가 표현에서 외연이 넓어졌다. 미래주의자들이 움직임과 속도를 느끼게 하는 중첩 기법은 에티엔 쥘 마레의 연속 동작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회화와 함께 화가가 지닌 ‘회화에 대한 개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가 <끈에 묶인 개의 역동성>을 그렸다. 미래주의라는 진지한 이름과는 달리, 그의 그림은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 제목에 그들의 주제인 ‘역동성’이라는 단어를 넣어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구도도 파격적이다. 불가피하게 여성의 발 부분에 집중했다. 한 여성이 애완견 닥스훈트를 데리고 걷고 있다. 닥스훈트,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은 오소리 사냥개이다. 발라는 여성의 발과 개의 다리가 중첩된 형태로 그렸다. 그는 역동성을 담는데 닥스훈트의 짧은 다리가 안성맞춤이라 여긴 듯하다. 실제 작품 속에서도 여성보다 종종걸음을 치면서 꼬리를 흔드는 닥스훈트의 특징이 유쾌하다.
속도의 문제는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 상대성이론과 관련이 있다. 속도는 시간의 문제이며, 원래부터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태초의 우주에는 시간이 없었다. 빅뱅이라는 기준점이 생김으로써 이후 발생한 사건과의 사이에서 시간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속도는 쌍방의 관계, 즉 방향에 따라 상대적다. 그런데 빛의 속도만이 절대적(초속 약 30만 km로 일정하다)이라는 논리가 특수 상대성이론이다.
발표 이후 과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인지의 혼란을 느꼈다. 시간과 속도에 대한 상대성이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발리는 속도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리듬과 소음까지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 <리듬+소음+자동차의 속도(1913)>가 그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니 당연히 추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자동차(1915)>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역동적인 추진력을 연속적인 대각선으로 표현하려 했다.
보치오니는 1910년 초 <미래 선언>을 출판한 필리포 톰 마소 마리네티와 교류했다. 그리고 3월 8일 토리노의 한 극장(Politeama Chiarella)에서 ‘미래주의 선언’에 동참하면서 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랬던 그가 1912년에 베를린 슈투름 갤러리에서 열린 ‘미래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외곽 산업지구에서 노동자 계급이 새롭게 성장하는 현장을 힘찬 붓질로 증언했다. <The Street Enters the House>, 직역하면 ‘거리가 집으로 들어온다’ 정도이다. 거리가 집으로 들어오니 얼마나 시끄러울까? 최초 카탈로그에 의하면, "결정적인 감각은 창문을 열 때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삶과 거리의 소음, 외부 사물의 움직임과 현실이 동시에 유입된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길가의 소음이 집안을 울리다>라는 의역도 제목으로 반길 만하다.
작품은 ‘무너져 해체된’ 입체주의의 형태와 야수주의적 강렬한 색채로 이루어졌다. 그가 받은 영감의 결과이다. 전경을 꽉 채운 여인과 중경(中景)의 주민들이 발코니에 서서 건물 공사 현장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내려다본다. 마치 도시와 기계 문명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미래주의 예술가의 모습과 흡사하다. 공사장 철근 구조물 사이로 인부들의 작업이 한창이다.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도시의 발전과 산업 발전을 찬양하는 현장이다. 그 발밑으론 말이 나타났다. <도시의 성장(1910)>에서 ‘힘’을 상징하며 등장한 바로 그 말이다. 집들이 옆으로 기울어진 것이 해체되는 건물 사이로 들려오는 소음이 꽤 시끄럽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보치오니는 과거를 거부하고 도시에서 경험하는 현대적인 현상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빛, 소음, 테크놀로지, 인간 군상, 그리고 역동성 등 도시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린 듯했다. 화가로 입문한 그는 조각을 통해서도 ‘움직임’을 구현하려 애썼다. 미래주의 미술은 마르셀 뒤샹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앞서 언급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Ⅱ(1912)>이다. 인간을 기계처럼 평면과 원추형 등으로 단순화했고, 역동성과 지속성을 강조했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이 미래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은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미래주의도, 그들이 예상했던 인류의 미래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종말을 맞았다. 자원입대한 보치오니가 기병대 훈련 중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1916년, 당시 나이 33세였다. 작가로서 제대로 꿈도 펼쳐 보지 못한 채 미래를 향한 날개를 접었다. 더불어 미래파 운동도 1918년부터 추진력이 현격히 약화되었다. (제목 사진은 보치오니의 <일어나는 도시(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