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으로 물질주의적 부르주아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기술과 과학의 전능성을 믿으며 타락해가는 사회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했다. 자연스럽게 반(反)문명, 반이성, 반예술 운동이 확산했다. 다다이즘(dadaism)이다. 191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발하여 1924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예술 사조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했다. 문학이 선도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후고 발(Hugo Ball)이 취리히 뒷골목 카바레 주인인 얀 에프라임을 꼬드겨 ‘볼테르(Cabaret Voltaire)’란 주점을 열었다.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리하르트 휠젠베크, 장 아르프 등과 함께 어울리면서 형식에 벗어난 예술을 실험하고 외연의 확장에 힘쓰는 '느슨한 단체'를 구성했다. 카바레 개장과 정기 간행물 <카바레 볼테르> 발간 사이인 4월 18일쯤 ‘다다’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연대를 일러 오늘날 ‘취리히 다다’라고 부른다. (매슈 게일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나무위키) ‘다다(Dada)’는 프랑스어로 목마(木馬)라는 뜻이지만, 의미 없이 사용한 말이다.
당시 스위스는 전쟁을 피해 도망친 지식인의 도피처였다. 그들은 태성적으로 기존 관습과 제도에 저항한다. 소설가 헤르만 헤세와 제임스 조이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 등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다다 운동에서 미술의 특징은 다양한 아방가르드적 실험성과 느슨한 형태의 국제주의에 있다. 스위스 외 지역으로도 확산했다. 1917년 새로운 화랑 ‘다다 갤러리’가 만들어졌으며, 짧은 기간 동안 전시회를 세 차례 열었다. 처음 두 전시회는 칸딘스키와 클레를 소개하는 대여 전시였으며 세 번째에서는 프리츠 바우만, 막스 에른스트, 코코슈카, 그리고 쿠빈을 포함하는 전시회였다. 그해 5월 말 갤러리가 문을 닫았으나 출판 활동에 전념하면서 1919년 <다다> 1, 2호가 발간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의 기고가 높은 비율을 차지했는데, 조르조 데 키리코를 비롯한 ‘형이상학적 예술’ 그룹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무정부주의 성향을 보였음에도 제1차 세계대전 중 징집과 조국이 대적(對敵) 관계로 갈리게 됨으로써 성격이 조금씩 변했다. 그중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이탈리아 미래파와의 갈등이 특히 심했다. 종전 후 활동의 중심지가 독일, 파리로 옮겨졌다. 퀼른에서는 막스 에른스트, 베를린 다다는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 제목 작품은 그의 <기계적인 머리(시대정신, 1920?)>), 해나 회흐, 존 하트필드, 게오르게 그로츠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표현주의자와도 날을 세워 대립했다. 장 아르프와 만 레이가 중심이 된 파리 다다는 입체주의자와 결별했다. 전체적으로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리고 뉴욕과의 연결이 중요했다. 화가이자 시인인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 뒤샹, 그리고 아폴리네르 세 사람의 기여가 컸다. 피카소하고 각별했던 시인 아폴리네르는 서정적 입체주의 그룹에 ‘오르피즘(Orphism)’이란 이름을 선물하였으며, 피카비아와 뒤샹은 신세계 뉴욕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즈음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이 다다이스트로 활동하면서 갈등에 중심에 섰다. 그는 파리대학 의대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육군병원 정신과 및 신경과에 근무하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리고 1921년 10월 티롤에 머무를 때 프로이트를 만나 자유연상 기법을 체계화하면서 초현실주의로 진입하는 돌다리를 놓았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 혹은 정신분석학은 인과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과학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치료 과정일 뿐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주술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다. (리처드 파인만,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이 말은 과학만이 가치 있다는 의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가 E.H. 카가 ‘유럽의 내전’이라고 명명했던 1차 대전에 큰 충격을 받은 그가 인간의 주인이 이성적 자아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본능이라는 지적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여하튼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최초의 시도였고, 많은 지식인이 이에 심취했다.
프로이트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브르통이 1924년 10월 <첫 번째 초현실주의 제1 선언>을 발표했다. “아무런 이성의 통제가 없는 진정한 사고 활동에 의한 표현을 목적”으로 했다. 산발적으로 드러냈던 초현실주의 활동이 운동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예술계에서 주류로 부상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이스트들과 일부 생각을 공유했지만, 좀 더 조직적으로 현실 세계에 관여했다. 반면 진정한 반예술을 추구했던 피카비아가 1921년 다다를 떠나고, 이듬해 창립자 트리스틴 차라가 독일 다다이스트와 결별(라투스, <근대 미술>)하면서 다다 운동의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브르통이 열거한 초현실주의 회화의 원조들은 다음과 같다.
“고대의 우첼로부터 현대에는 쇠라, 귀스타브 모로, 마티스(예를 들어 <음악>에서), 드랭, 피카소(훨씬 더 순수하다), 브라크, 뒤샹, 피카비아, 데 키리코(오랫동안 존경받아온), 클레, 맨 레이, 막스 에른스트, 우리들과 가까운 앙드레 마송이 있다.” (매슈 게일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직접 공헌한 바 없음에도 편입되었고, 실제 중요한 인물은 마지막에 배치했다. 가장 중요한 지적 개념은 자동주의, 즉 자유연상에 기초한 시각 예술이란 점이다. 생물 형태의 부드러운 형상이 때로 독특한 질감과 어우러지는 마송, 미로, 아르프가 ‘추상적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다. 그에 비해 나중에 이 운동에 참여한 마그리트, 탕기, 달리의 초현실주의는 몽상적인 회화였다. 정신의학자들이 환자의 질환과 관련된 정신적 원인을 추적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성이 부분적으로 마비된 환자들이 내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분출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건강한 화가들도 미술 치유로 사용되던 이런 정신분열증적인 이미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다른 세계로 가는 창문’ 중 다른 하나는 꿈이다. 꿈은 아직 어떻게 내면에서 발현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인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19세기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초기 인류가 사후 세계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 원인이 꿈이라고 주장했다. 매일 밤 기이하고 유별난 이탈을 겪으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꿈에서 만났다가 깨어나면 그들이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그 먼 옛날, 이성이 숙성되기 전 일이니 왜 안 그렇겠는가? 학창 시절 프로이트에 심취했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특히 꿈에 천착했다. 그는 소파에서 낮잠을 즐길 때 바닥에 냄비를 두고 손에 수저를 들었다. 잠이 들어 손에 힘이 풀리면, 수저가 냄비 위로 떨어지면서 그 소리에 잠을 깼다. 잊기 쉬운 꿈을 생생하게 이미지로 남겨 작품의 모티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과 그의 대표작 <시간의 영속성>에 그 이미지가 잘 드러나 있다.
<시간의 영속성>은 초현실주의를 얘기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키리코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 불안과 성적 환상을 캔버스에 옮겼다. 전경에 바닥을 기어가는 달팽이 비슷한 것이 화가의 눈꺼풀과 코다. 그리고 코 아래 보이는 것은 혀다. 그 위 시계가 구부러졌다. 발기 불능, 달리의 성적 불안을 암시한다. 나뭇가지와 탁자 모서리에도 시계가 있다. 특히 탁자 위의 파리와 함께한 큰 시계는 중력의 힘을 감당 못하고 치즈처럼 축 늘어져 원형 곡선에서 이탈한 모양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형상의 왜곡이며,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다. 꿈에 본 카망베르 치즈를 그렸다고도 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따라서 시계가 녹아내리는 것으로 시간의 유동성을 형상화한 달리의 작품은 상대성 이론과 개념을 같이 한다. 정상적인 시계 하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붉은색의 그 시계 위로는 개미 떼가 몰려 있다. 죽음을 예감케 한다. 멀리 포르트리가트의 험준한 해안선이 보인다. 달리의 집이 있던 스페인 북부 리가트 항구 근처의 실제 해안 풍경이다. 그렇다면 바다와 뭍 사이의 경계가 현실과 초현실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가른다고 볼 수 있다.
스물일곱 살에 얻은 영감을 단번에 담아낸 이 작품으로 인해 과시적이었던 그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초현실주의는 1933년 무렵이 되자 더 이상 반란이 아니라 권력이 되었다. 그러나 집단성이 강했던 초현실주의는 파시즘의 부상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소속 인원들이 망명을 떠나면서 막을 내렸다. 1942년 뉴욕에 그 둥지를 틀었으나 다시 파리의 분위기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막스 에른스트는 이렇게 썼다.
“뉴욕에는 우리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예술은 없었다. 혼자서 예술을 만들 수는 없다. 예술은 다른 이들과의 아이디어 교환에 아주 많이 의존한다.” (카트린 클링죄어, <초현실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