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의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1947)>를 중심으로
인류의 이성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교훈을 제대로 도출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리틀보이'와 플로투늄탄 '핏맨'이 떨어졌다. 히로시마에서 즉사한 7만 명을 포함하여 1950년까지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전쟁의 핵심 목표는 승리가 아니라 전쟁을 피하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사람이 간과해서는 안 될 통계가 하나 있다. 일제 강제 노역에 끌려간 67만 명 중 2만 명이 히로시마에서, 2천 명이 나가사키에서 죽었다. 비중으로 보았을 때 일본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희생당했다. (김채린, <세 번째 세계>)
그러나 전쟁이 끝난 1946년, 다시 핵폭탄 실험이 이루어졌다. 비키니섬, 루이 레아르의 패션쇼에 등장한 배꼽이 보이는 수영복과 같은 이름이다. 그곳에 ‘길다’와 ‘헬렌’이 떨어졌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의 1천 배에 달하는 위력이었다. 이때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가 영감을 받아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를 그렸다.
달리는 부뉴엘과 함께 만든 17분짜리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로 뒤늦게 파리의 아방가르드 사회에 뛰어들었다. 안구에 면도칼로 긋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 작품이었다. 이후 1930년대 그의 이름은 초현실주의와 동일시됐다. 1937년 달리는 아내 갈라의 조언으로 키리코처럼 고전적 스타일과 기법을 사용했다.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는데,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는 이후의 작품이다. 한 해 전 완성한 <멜랑콜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1945)>보다 더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구름버섯 모양의 핵폭발을 사람의 머리와 나무로 표현했다.
“핵폭탄을 찬미한다”는 견해를 밝힌 달리는 당시 대중의 욕망을 대변했다. 핵의 후폭풍을 짐작조차 못 했기에 가능했던 열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출신 달리는 이런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었다. 고향 선배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는 물론 동료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의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1937)>의 배경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게르니카의 참상과 연관 지어 민간인 희생을 배경으로 하는 어떠한 폭력에도 단호한 태도를 취했어야 옳다.
달리와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모두 카탈루냐 출신이다. 그러나 성격이나 정치적 행보에서는 대조적이었다. 달리의 트레이드마크인 카이저수염을 달고 각종 기이한 행동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지나치게 과시적이었다. 그는 생전에 큰 부를 축적했고, 미술작품 말고도 의상 및 가구 디자인, 무대장치,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스펠 바운드(1945)'의 미술감독 등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내내 초현실주의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스캔들을 일으켰다.
아랫부분의 알몸을 드러낸 레닌을 그린 <윌리엄 텔의 수수께끼>는 시작이었다. 게다가 이 스캔들을 해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아프다며 체온계를 입에 문 채 반대 심문에 임했다. (매수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앙드레 브르통이 공산당과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아라공을 비롯해 회원들이 탈퇴가 이어졌을 때다. 결국 달리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되었다.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는 <초현실주의>에서 히틀러를 거론하며 ‘파시즘에 대해 명백한 찬미’로 야기된 문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스티븐 파딩은 <501 위대한 화가>에서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좇는 것을 거부한 것이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1936년 유명한 <삶은 콩으로 된 부드러운 건축물: 시민전쟁의 전조>와 <가을의 식인 풍습> 등 시민전쟁에 관한 그림을 예닐곱 점 그렸다. 그런데 이것은 공화당에 대한 지지 표명이라기보다 소요의 잔학성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것이었다. 달리는 히틀러에 대한 태도가 모호했고, 2차 대전 후 조국의 프랑코 파시즘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무정부주의자로 자처하며 사회·정치적 상황을 담았던 기존의 태도를 뒤집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는 핵실험에 관한 그의 아마추어적인 호기심의 반영이었다.
1918년 첫 개인전에서 호안 미로는 야수파의 영향을 보였다. 이듬해 파리에서 피카소와 사귄 후 1921년에는 입체파 풍을 선보이기도 했으나 이듬해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초현실주의로 돌아섰다. 그의 작품은 기괴하지 않고, 몬드리안이 보여준 기하학적 추상화가 아니다. 사물을 단순화하면서 궁극의 질서와 균형을 구현하려 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자연을 표현하면서 유머를 곁들였다. 정치적 참여를 계속 거부하면서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한 파시시트의 위협을 통찰력 있게 다루었다.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에서 그간 보여주었던 웃음기를 싹 뺐다. 익숙한 생필품인 사과, 빵 한 덩이,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이용하여 스페인 내란과 연관한 재난의 분위기를 담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잔혹한 포크의 날에 사과가 관통되었다. 포크는 총검이며, 사과는 스페인이다. 너덜너덜한 포장지로 싼 포도주병은 불에 탄 듯 뒤틀리며 검게 변했다. <게르니카>가 보여준 분노에 필적한다는 평가다. 실제 스페인 공화국의 의뢰로 제작한 <죽음의 신, 카탈루냐 반란의 농부(The Reaper, 1937)>는 <게르니카>와 함께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렸다. 5.5m 대형 벽화는 스페인으로 반송될 때 불가사의하게 사라졌지만, 같은 시기에 제작한 석판화 포스터 <스페인을 돕자(제목 그림)>에서 그 벽화에 담겨 있던 분노가 느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의기소침해진 미로는 나치즘이 승리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곤 사랑하는, 또는 살아갈 이유가 되는 모든 것이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 (롤렌드 펜로즈, <호안 미로>) 나치를 피해 다니면서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 공포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바람을 암시했다. <탈출의 사다리>가 그것이다. 이후 사다리는 일관되게 ‘탈출’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기호 언어가 되었다. 이즈음 그린 <별자리> 연작(1940~1941) 20점을 브르통이 1959년 산문을 곁들인 화보에 발표했다. 두 사람은 평생 초현실 운동을 함께한 동지이자 서로 가차 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적수였다. 브르통은 미로를 “우리들 가운데 가장 초현실주의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별자리> 연작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미로의 <별자리>는 연합군 상륙작전 직후, 미술적 차원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전해진 개전 이래 최초의 메시지다. 이것이 메꾸어 준 공백의 깊이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브르통의 <성좌> 서문,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에서 재인용)
대부분의 화가가 미국으로 집단 이동했을 때 미로는 1942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흑백 화면에 전쟁 전 국제상황에 대한 좀 더 격렬한 감정을 담은 석판화 <베르셀로나 연작(1944)> 50점을 남겼다. 모친이 사망 후 고립 시기를 끝낸 그는 1947년 뉴욕에서 8개월을 머물렀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즉흥성을 보여주는 ‘자연발생적인 회화’를 시도했다. 1956년부터 마요르카섬 칼라마요르에 새 작업실을 꾸미고 만년의 작업에 몰두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도자기, 석판화, 동판화에 몰두했다.
1959년에야 미로는 다시 그림을 그렸고, 관심은 공간으로 옮겼다. 낮과 밤의 조화를 주제로 한 <블루(1960~61)> 연작의 거대한 파랑은 하늘과 바다, 나아가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피카소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은둔적인 성향을 보였음에도 현실 세계를 잊고 지내진 않았다. 1970년, 악명 높은 부르고스 재판에서 바스크 그룹 ETA 몇몇 단원들이 사향을 선고받자 카탈루냐 미술가와 지식인과 연대하여 시위행진을 했다. 지중해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며 생명을 유지하던 노년의 거장 미로는 1983년 ‘사다리’를 타고 밤하늘로 올라갔다.
한편 핵실험으로 강제 이주했던 비키니섬의 원주민 176명이 22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미국 정부의 장담을 믿고 찾은 고향이었다. 그러나 갑상샘암, 위암, 폐암 환자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기형아가 태어났다. 1974년 주민들은 다시 섬을 떠나야만 했고, 이제 아무도 이 섬이 원래의 모습을 찾는 데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오펜하이머는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며 몹시 괴로워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는 이때부터 과학과 윤리를 연관시켰다. 하지만 반핵 분위기는 1960년대에 와서야 조성되었고, 핵폭탄이 이성과 과학의 승리가 아니라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독일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전후 이중성을 보였다. 서른한 살에 노벨상을 탄 천재 물리학자인 그는 변명에 급급했지만, 전쟁 중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기 열흘 전 자신을 찾아온 칼 폰 바이츠재커에게 회한이 가득 찬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물리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 그들이 중요한 거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비로소 살바도르 달리를 이기적이고 뻔뻔하며 정신병자라고도 하는 까닭을 알 듯하다. 어떤 이는 작품과 작가의 가치관이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은 기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의 가치관과 상상력이 담긴 시각언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내 갈라(Gala)에 관한 그의 순정은 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 동료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다. 평생 달리의 뮤즈로 평생을 함께 지내던 그녀는 1982년 사망했다. 달리도 삶의 끈을 놓아버린 채 그녀의 시신을 안치한 푸볼성에서 7년간 칩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향한 그의 애정과 관심을 이웃으로 좀더 확장했으면, 어땠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