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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08. 2022

샤갈, 고향 비테프스크와 아내 벨라

<나와 마을(1911)>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대표작 <나와 마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유명해졌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 아궁이에 지핀다.


염소와 샤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작품의 배경은 그가 나서 자란 고향 비테프스크(현 벨라루스 공화국의 도시)다. 그의 추억과 꿈이 담긴 이곳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고통의 시대를 극복하고 98세까지 장수한 삶의 원천이다. 고향에 대한 절절함을 그는 이렇게 글로 표현했다.


“내 사랑하는 마을 비테프스크. … 나는 이제 너와 살지 않지만, 네 즐거움과 슬픔이 반영되지 않은 내 그림은 단 하나도 없어...”


<생일(1915)>

샤갈의 작품 속에서 빠질 수 없는 또다른 중요한 모티브가 아내 벨라 로젠펠트이다. 1915년 7월 25일 고향 비테프스크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제목 사진: <에펠탑의 신랑 신부(1913)>) 결혼식을 앞두고 샤갈의 생일날(7월 7일)을 맞아 벨라는 연인을 위해 꽃다발을 가져왔다. 자신의 생일인 줄 몰랐던 샤갈은 감동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당시 애틋한 사랑이 잘 녹아 든 <생일>을 그렸다. 벽에 걸린 직물의 무늬와 식탁 집기들, 그리고 창밖 풍경까지 배경 묘사가 세부적이다. 몽환적인 모습이 아니라 샤갈이 단단히 새겨 놓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부푼 마음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냈다. 샤갈이 공중에 붕 떠올라 몸을 비틀어가며 벨라와 입맞춤하려 한다. 그녀도 몸을 살짝 띄우며 눈을 감고 있는 샤갈의 입술을 찾아간다. 꿈같은 사랑이다. 다음 날 샤갈은 벨라에게 다시 와 주기를 청했다. 그리고 이때 초안을 잡은 작품이 <마을 위를 날아서>로, 두 사람의 사랑은 더 높이 날아올랐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람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샤갈, <나의 삶>, 인고 발터의 <마르크 샤갈>에서 재인용)


탄생(1910/1912)

비테프스크의 당시 인구가 5만 명 정도인데 유대인이 절반 정도였다. 그곳 보석상의 딸이었던 벨라와는 달리 샤갈은 8형제와 함께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다. 첫 그림을 부엌에서 그렸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탄생>을 보면, 샤갈의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열악한 환경을 확인할 수 있다. 극적인 빛 처리와 붉은 칸막이가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진 장면 같다. 창백한 얼굴로 커다란 가슴을 드러낸 채 천 조각 하나를 걸친 어머니는 피를 흘린 채 군용 침대에 누워있다. 산파가 발가벗은 갓난아이를 들어 올려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턱수염이 무성한 아버지는 왜 침대 밑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일까? 그의 해학으로 보인다. 1912년 <탄생>에선 침대와 나무 목욕통은 그대로이지만, 집안 형편이 한결 나아졌음을 알 수 있다.

<묘지의 문(1917)>

벨라와는 1909년, 열두 살 때 만났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그녀는 같은 공동체에서 자라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기에 샤갈과 공감대가 넓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인 1914년 6월 13일,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샤갈은 벨라도 만날 겸 3개월 만기 여행 비자를 발급받았다. 그러나 국경이 폐쇄됨으로써 몇 주 정도 예상했던 체류 기간이 8년으로 연장되었다. 그곳에서 샤갈은 가난했다. 벨라의 집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9개월 후 딸 이다가 태어나자 모든 장애가 사라졌고, 둘은 행복했다. 

‘색채의 마술사’ 샤갈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와 꿈꾸는 듯한 초현실적 세계를 캔버스에 담아 유명하다. 하지만 도피적인 태도를 포장했다는 비판이 상존한다. 일면 타당하다. 그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누구보다 환영했다. 유대인에게 자유 시민이란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해준 혁명이 전위 미술가의 생각과 본질적으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시민권을 갖은 그는 비테프스크의 미술인민위원에 임명되었고, 미술학교 교장직을 수행했다. 이때의 작품 중 하나가 <묘지의 문>이다. 묘지지만, 그 모습이 밝고 당당하다.


<혁명(1937)>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그에게 좌절과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회화에서 획일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원했다. 그리고 순수 러시아 혈통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선택했다.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샤갈은 러시아에서도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특히 비테프스크에서 터전을 잡은 말레비치가 샤갈을 새로운 세계 건설의 의지도, 역량도 없다고 몰아부쳤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에 그는 학교를 떠났고, 1923년 파리로 완전히 정착했다. 부부는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사적 격랑을 이겨냈다. 프랑스 시민권을 받은 그해 자신이 경험한 러시아 <혁명>을 화폭에 옮겼다. 

배경은 눈 덮인 모스크바의 한 공간이다. 중앙에 설치된 나무 테이블 위로 레닌이 오른팔 하나로 균형을 유지한 채 물구나무하고 섰다. 그로 인해 시작된 러시아의 혼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캔버스 속 세상은 마치 고갱의 <설교 후 환영(1888)>처럼 크게 둘로 분리되었다. 왼편은 막대기와 총으로 무장한 붉은 전위대가 겹겹이 무리 지어 있다. 오른편은 다양하며, 그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해서 담다 보니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없으며, 기법상으로도 완성도가 떨어진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더욱 급박해질 때 <혁명>을 패널 세 개로 제작하여 정치와 종교적 상징주의를 융합했다.

<바바의 초상화(1966)>

1940년 프로방스의 고드로로 거처를 옮겼다가 정부가 나치와 휴전 협정을 맺게 되면서 유대인에겐 프랑스도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해 6월까지 프랑스 인구의 1/4이 피난을 떠났다. 샤갈은 지중해와 맞닿은 남부 마르세유에서 불심검문으로 체포되어 독일 측에 인계될 위기도 겪었으나 1941년, 마침내 미국으로 피신했다. 이국적인 인종과 문화가 만나는 대도시 뉴욕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1944년 벨라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했다. 샤갈은 힘들게 그해를 보내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후 1948년 8월 샤갈은 완전히 프랑스로 돌아왔고, 1950년 남부의 작은 도시 방스에 정착했다. 특히 이곳의 아름다운 해변 코트다쥐르는 삶에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벨라가 죽은 지 8년이 되는 1952년 7월 12일 25살 연하 줄리 발렌티나 브로드스키(바바)와 재혼했다. 딸이 소개해 준 유대인 여성으로, 샤갈이 예순다섯 살 때였다. 활력을 되찾은 그가 작업실 안 의자 등받이에 왼팔을 올리고 앉아 있는 <바바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녀의 내면을 두 사람이 서로 껴안은 모습으로 채웠다. 배경에는 샤갈의 오래된 레퍼토리인 에펠탑이 보이고, 창밖으론 새와 달, 그리고 마을 길도 보인다. 하지만 붉은 머리의 짐승이 수상하고, 전체적인 색조가 어둡다. 그녀와 결혼 기간은 벨라 때보다 더 길었다. 그러나 사랑의 절절함에 있어서 벨라에 못 미치는 느낌이다. 선입견일까? 샤갈은 97세가 되던 1985년 3월 28일,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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