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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07. 2022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의 탄생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수병과 프랑코주의자들에게 희생당한 공화파 26명의 집단 매장 현장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희생은 널리 알려지었지만, 스페인의 불행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1936년, 스페인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2월 총선거에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했다. 그러자 그해 7월, 프랑코 장군이 인솔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지 오웰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의용군으로 인민전선 정부를 도왔다. 하지만 내전의 성격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좌우간에도 파벌이 심했으며 무수한 거짓말이 난무했다. 그리고 지금도 진실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프랑코 지원은 실제적이고 신속했다. 1937년 4월 26일, 나치 콘도르 군단의 폭격기 24대가 스페인 북부의 한적한 마을을 공격했다. 당시 독일의 공군력은 이미 연합국을 능가한 상황이었다. 역설적인 결과였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군대를 대폭 감축하자 그들은 효율성을 선택했다. 1931년에 이미 초현대식 공군의 기초를 다졌고, 1934년 12월에 보르쿰섬에서 20세기 최초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1>) 독일 공군은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실험했는데, '공포 폭격' 전술이라 불렀다.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과 시설을 공격하여 공포감을 줌으로써 적을 항복 혹은 위축시키겠다는 무모한 발상이었다. 민족의식이 강한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선택했다. 2시간 넘게 세 차례나 진행된 폭격으로 불탄 도시는 80%가 파괴되고, 주민의 1/4에 달하는 1,645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수천 명이 중상을 입었다. 나치 독일이 국제연맹에서 탈퇴(1933)하고 라인란트 재무장을 한 이후에 벌인 만행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교훈을 얻은 민주 진영의 국가, 즉 영국과 프랑스는 신중하기만 했다. 아니, 불간섭 정책을 고수하며 애써 못 본 척했다. 이런 방관적 태도는 히틀러의 도발을 불러왔다. 그는 평화라는 가면을 쓰기만 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의 침략 야욕을 저지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 ‘하나 된 독일’을 구호로 오스트리아에 이어 9월,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를 무혈 병합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인 거주 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는 대신, 체코 국경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뮌헨 협정에 서명한 덕분이었다. 이듬해 3월 독일은 체코를 병합했고, 8월 23일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9월 1일 새벽 폴란드를 침공했다. 6개월간 평화를 맛본 영국과 프랑스는 그제야 독일에 선전 포고(9월 3일)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게르니카 폭격 후 잔해

반면 게르니카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처음 사용한 공포 폭격 전술은 전쟁 기간 중 모든 전선에서 자행되었다. 독일군 측은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군 측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막바지에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게 원자탄을 투하한 것도 같은 목적 하에서 저질러졌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가해자 일본이 전후 마치 피해국인 양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유감스러운 행동이었다. 전시 전체 사망자와 비교, 민간인 사망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5%였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48%에 달했다. 두려운 사실은 이후 한국전에서는 84%, 베트남전에서는 92%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원복, <새 먼 나라 이웃 나라/도이칠란트>) 지나치게 확대하여 해석한 것일까? 그러나 처음 게르니카에서 민간인의 희생당했을 때 유럽 사회가 한 목소리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어야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처음 그들이 덮쳤을 때 First they came>

     부제; 방관과 침묵의 대가           - 마르틴 니묄러 -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뒀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에게 들이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르니카(1937)>

1937년 1월에 스페인 민주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작품을 의뢰받은 피카소가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형식적으로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나 대표적인 비정치적 인물이다. 그러나 4월 30일 자 <스 수아르> 프랑스어 번역 기사를 통해 사건을 알게 된 피카소는 자유와 평화의 옹호자로 대변신했다. 그해 여름,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가로 776cm, 세로 348cm 크기의 불후의 명작 <게르니카>가 걸렸다. 박람회의 주제는 ‘현대 생활에 적용되는 예술과 기술’이었다. 그림은 최신예 폭격기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었으니 피카소가 주제에 충실했다고 봐야겠다. 구상 작품으로는 이 비극을 표현할 재간이 없었다. 대중의 이해가 어렵더라도 그의 분노까지 해체해야 했다. 

피카소는 죽음을 앞에 둔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뒤섞었다. 인물의 얼굴에서 개성을 지워버리고 평면의 형태를 변형했다. 전체적인 색조는 절망을 담아내기 위해 원색을 사용하지 않고 어두운 회색 톤을 유지했다. 소가 맹목적인 폭력이라면, 말은 박해받은 민중을 상징한다. 울부짖는 말의 몸통에는 당시 신문 지면을 도배했다. 삼각형 구도를 이루는 바닥에 널브러져 죽은 남자의 팔이 절단되었다. 그러나 떨어져 나갔음에도 칼을 움켜쥐고 놓질 않는다. 그곳에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희망의 상징일까? 불타는 집안에서 두 팔을 들고 절규하는 여인의 눈은 고통으로 인해 시선이 뒤틀렸다. 왼편 가슴을 드러낸 채 간신히 무너지는 집에서 빠져나온 여인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피에타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보니 등장인물 모두가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무자비한 살상이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1939년 공화파 정부가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가 함락됨으로써 내전은 끝났다. 피카소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이 작품을 임대해 주면서 "스페인에서 진정한 공화정이 회복되면, 그때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981년 10월 25일, 피카소 탄생 100주년에 맞춰 <게르니카>는 고국 땅을 밟았고, 마드리드의 소피아 왕립 미술관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이 그림에는 많은 의미가 담겼지만, 한 가지 일화로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 1941년 겨울, 파리에 주둔한 어느 독일군 장교가 센 강 옆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왔다. 그곳에 있던 <게르니카> 엽서를 꺼내 집어 들고 그가 물었다. "당신이 한(그린) 거요?" 피카소는 짧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아니, 당신들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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